이백만 요셉(캄보디아 하비에르학교 홍보대사/전 청와대 홍보수석)
영국 시인 데이비스의 말을 빌릴 것도 없다.
숲 속을 산책할 때, 다람쥐들이 도토리를 감추는 재롱을 볼 여유조차 없다면, 그게 무슨 인생이란 말인가.
환갑 줄에 들어서면서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밀려왔다. 복음서를 보면 길이 보인다고 했는데…, 아무리 읽어봐도 길이 보이지 않았다.
사실은 그런 기대를 한다는 게 무리였다. ‘발바닥 신자’ 주제에 복음서를 백번 읽은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렇게 복음서를 읽고 있었는데도 나의 눈에 확 꽂힌 단어가 하나 있었다.
외딴곳! 이 말 한마디가 나의 인생항로를 사정없이 바꿔놓을 줄을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예수님은 중요한 일을 하시기에 앞서 외딴 곳에서 기도를 드리셨다. 사도들에게도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고 권면하셨다. 외딴곳으로 가자! 외딴곳으로 가서 인생피정을 하고 돌아오자!
배낭 하나 둘러메고 홀로 떠났다. 낯선 땅, 캄보디아로! 장애인직업기술학교인 반티에이 쁘리업(Banteay Prieb)에서 가톨릭 선교사들과 함께 살았다. 이곳을 베이스캠프 삼아 틈나는 대로 캄보디아 전역을 순례했다.
중부 내륙에 있는 깜뽕톰성당을 찾아간 적이 있다. 한국 예수회가 맡고 있는 성당은 기숙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가난한 중고등학생 30여 명이 성당에 의탁하여 공부하고 있었다. 희미한 형광등 아래서! 그야말로 형설지공(螢雪之功)이었다.
학생들과 어울려 저녁 식사를 할 때였다. 얼마나 배가 고팠는지, 박진혁 신부의 식사 기도가 끝나자마자 식탁 위의 음식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해치워 버리는 게 아닌가.
반찬은 비싸서 추가공급이 안 됐다. 그러나 밥만은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다. 식탁에는 짜디짠 젓갈과 간장이 놓여 있었다. 학생들은 솥에서 밥을 퍼다 간장과 젓갈에 비벼 먹었다. 보통 두세 그릇씩 해치웠다. 그렇게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박 신부는 논농사를 많이 짓고 있었다. 학생들이 밥이라도 실컷 먹게 하려면 쌀을 자가 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 서울 달동네에서 자취할 때가 떠올랐다. 반찬이 없을 때는 밥만 한 다음, 양조간장과 마가린을 밥에 비벼 먹었다. 배를 채우기 위해 라면을 일부러 불려서 먹기도 했다. 그래도 맛있었다. 희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한국의 1960년대 수준입니다. 정말 어려워요. 그래도 희망은 있습니다. 교육이 희망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시도가 캄보디아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환풍기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박 신부는 쉽게 ‘환풍기 역할’이라고 말했지만, 이 말은 지금도 나의 뇌리에 꽉 박혀 있다.
예수회 신부들이 캄보디아에 ‘대형 환풍기’를 하나 설치하고 있다. 캄보디아 북서부 국경 지역의 가난한 도시 시소폰(Sisophon)에 36학급 규모의 초중고등학교를 짓고 있는 것이다. 캄보디아 하비에르 예수회 학교(Xavier Jesuit School Cambodia)!
지구 상의 외딴곳 캄보디아, 캄보디아의 외딴곳 시소폰! 시소폰의 ‘하비에르 환풍기’가 캄보디아의 탁한 공기를 뽑아내고 희망과 사랑의 새 바람을 불어넣어 줄 것이라 믿는다. 먹먹한 골방의 천장을 확 열어 재칠 수는 없지만 천장에 작은 구멍 하나 내어 환풍기라도 달 수만 있다면…, 그게 희망 아니겠는가.
하느님이 맺어준 캄보디아와의 소중한 인연을 잘 간직하고 싶어서, 하비에르 학교를 짓는 데 벽돌 한 장이라도 돕고 싶어서, ‘홍보대사’를 하게 되었다.
“주님, 항상 그들과 함께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