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준 장로(종교 칼럼니스트)
운명도 바꾸는 인격 변화
누구나 종교다운 종교를 가지게 되면 가치관, 인생관, 세계관, 역사관이 달라지게 되어 있고 따라서 전 인격에 변화를 가져오게 되어 있습니다.
킬케고올은 그리스도인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물오리들이 이 논에서 저 논으로, 저 논에서 또 다른 논으로 옮겨가는 것과 같은 수평적인 이동이 아니라 전연 새로운 형태의 기러기가 되어 하늘 높이 날으는 것과 같은 수직적인 이동이라고 했습니다.
물오리들이 논 바닥에서 자리 바꿈이나 하면서 누가 더 잘하고 잘못했는가, 누가 더 정직하고 덜 정직한가하는 차원이 아니라 아예 세속을 벗어나 창공으로 높이 날아 올라 가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때 물오리가 보는 시계(視界)가 1㎡라면 기러기가 바라보는 시계는 1,000㎡ 이상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믿기 때문에 ‘성격을 바꾸면 팔자까지도 바꿀수 있다’는 속담과 같이 그렇게 변화된 신앙 인격은 우리의 운명까지도 바꿀 수가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어느 관상가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한 말입니다. 그가 과거에 400명의 관상을 보고 점을 쳤는데, 수 십년이 지난 후 그가 친 점이 얼마나 적중되었는지를 조사해 보았더니 90%는 맞았는데 10%(약 40명)는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맞지 않은 40명을 다시 분석해 보니 그들은 모두가 크리스찬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는 관상학 통계에서도 벗어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운명'이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고 무시하는 이유는 그 지워진 운명이라는 것 위에 하나님의 더 높으신 뜻과 섭리를 체험하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변화된 상태를 새 사람, 거듭남, 중생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통해서 맺어야 할 일차적인 열매는 바로 중생의 열매라고 믿습니다.
거듭남, 즉 중생의 변화가 나타날때 기쁨도 감사도 평화도 인내도 사랑도 죄사함 받은 감격도 자연히 따르게 되고 구원과 하늘 나라의 영광도 그 중생의 결과로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말씀 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기독교를 희망의 종교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일 우리에게 변화될 가능성이 전혀 없고, 중생할 기회가 완전히 막혀 있다면 그것은 허무요 절망이요 삶의 끝장일 것 입니다.
왜요? 그것은 주어진 대로 살고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자포자기의 삶이요 희망 없는 삶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단테의 작품 ‘신곡’을 보면 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이런 문구를 붙여 놓았습니다.
“여기로 들어가는 너희들, 모든 희망을 다 버려라.”
그렇습니다. 희망이 끊길 때 절망이 오고 절망의 연속이 곧 지옥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하늘나라 건설의 역군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이 땅에 하늘 나라를 건설하는 동력은 재력도, 권력도, 무력도 아닌 바로 ‘변화된 사람’ 즉 복음과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변화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아무것도 남기신 것 없이 오직 변화된 제자 몇 사람, 그것도 세상 기준으보 보면 지극히 미천한 몇 사람이, 그리고 그들의 신앙을 계승한 후대들이 2,000년 동안 온 세계 역사를 이렇게 변화시켜 놓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변화 입니다. 관상가의 점이 맞지 않을 만큼, 그래서 운명까지도 비켜갈 만큼 거듭난 신앙 인격으로 주위의 단 한 사람에게라도 영향을 끼쳐 하늘나라 확장에 미력이나마 동참하는 것이 택함 받은 자녀들이 감당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요 사명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