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준 장로(종교 칼럼니스트)
파괴적인
감정
사람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동물이 애정과 증오, 기쁨과 슬픔 등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감정들 중에는 우리 인체의 건강이나 생활에 유익이 되는 건설적인 감정이 있는가 하면 건강에 해롭고 삶에
불행을 초래하는 감정이 있습니다.
그러한 감정을 ‘파괴적인
감정’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그
파괴적인 감정들 중 대표적인 4가지가 <두려움>, <분노>, <패배의식> 그리고 <교만>입니다.
첫째, <두려움>의 감정에는 근심, 불안, 염려 등이 포함됩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번 나옵니다. 그 365라는
숫자는 1년의 날 수와 같아서 1년 내내 단 하루라도 근심, 불안, 염려,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우리에게 의식주의 문제까지도 염려하지 말라 하셨고
요한 사도는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요1 4:18)라고 높은 차원의 교훈도 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그 죽음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지니고 살면서, 근심, 불안, 염려 등 두려움의 굴레에 묶여,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기쁨, 감사, 평화와 영생의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분노>의 감정에는 적개심, 원한, 시기, 질투, 증오심이 따릅니다. 대체로 분노는 파괴적인 감정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 분노를 모두 다 부정적으로 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분노를 발한 기록이 성경에 있고, 링컨은 노예제도에 분노하였고, 4ㆍ19혁명은 부정선거에 분노한 학생들의 봉기였습니다. 대부분 사적인 이해관계에서
야기되는 분노는 부정적으로 평가되고, 공분, 즉 이타심에서
발하는 의분은 긍정적으로 평가됩니다.
우리가
분노를 어떻게 절제하고 조절해야 하는지를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조언하였습니다.
“어느
누구나 화를 낼 수 있지만, 꼭 화를 내야 할 사람에게, 알맞은
정도로 화를 내고, 꼭 필요할 때에, 정당한 목적 때문에
화를 내고, 올바른 방법으로 분노를 나타내야 한다.” 그가
남긴 조언대로만 실행한다면 분노는 긍정적인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패배의식>은 낙심, 의기소침, 열등감, 죄의식 등을 불러옵니다.
이 패배의식은 나를 누구와 비교할 때 나타납니다. 이렇게 비교의식을 가지고 사는 한 언제나
패배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나보다 한 두가지 우월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각기 다르게 창조하신 것은 각자 부여된 장점으로 서로 도와주고 도움 받으면서 사랑의 교류를 통하여 아름답고 선한 사회를 이루며 살도록 하시기
위해서이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스트레스 받고 패배의식 속에 살게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다 제각기 자기 분수와 능력에 따라 주어진 위치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절대로 스스로 패배의식을 자초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넷째, <오만>은 편견, 이기심, 자의식, 그리고 독선의 선봉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오만에 대하여 단호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
세계
역사는 개인이나 국가나 교만 때문에 쇠망한 기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우리에게는 앞에서
말한 파괴적인 감정을 억제시키고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맺는 열매는, 1)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 2)항상 기쁨 충만한 것, 3)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한 것, 4)오래 인내하는 것, 5)자비로운 마음, 6)선을 행하는 것, 7)모든 일에 성실하게 임하는 것, 8)온유한 마음, 9)모든 일에서 절제하는 것.
이 9가지 성령의 열매를 우리 생활 속에서 거두면서, 우리에게 밀려오는 모든 파괴적인 감정을 물리칠 수 있도록 늘 기도로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김 준 장로의 <신앙과 생활>을 추가로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