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문자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그때
그 여인
친구가
부부싸움을 했다면서 전화가 왔다. 별것 아닌 일로 작은 말다툼이 벌어졌는데 이젠 그것도 힘들다며 하하하
웃는다. 동창들 사이에 금실이 좋다고 소문난 친구다.
그런데
마지막 말 때문에 화가 쉽게 안 풀린다고 한다. 더 이상 왈가왈부하기가 귀찮아서 픽 웃고 마감하려고
했는데 느닷없이 ‘당신 밥 먹고 그렇게 할 일이 없어?’하더라나.
아무리 부부지간이라도 할 말, 안 할 말이 있잖아? 뭐라고 복수할 말이 없냐? 툴툴거린다. 농담처럼 한 말인데 뭘-, 우리 삼시 세끼, 밥값이나 제대로 하며 살자고 했더니 깔깔대며 전화를 끊는다. ‘당신
밥 먹고 그렇게 할 일이 없어?’ 어, 이 말은? 생각난다.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때 그 여인.
그
날의 다섯 사람은 서로 쳐다만 보아도 사랑의 미소가 솔솔 피어났다. 우리는 존경하는 분을 모시고 식사시간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일행은 식당 문이 열리기 30분 전 백화점의
소파에서 잠시 기다리려고 했다.
그곳에는 이미 한 여인이 앉아있었다.
모자라는 자리를 서로 양보하는 걸 본 그녀는 빤히 쳐다보다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후닥닥 일어났다. 나는
그분에게 감사합니다. 하며 진정으로 미안해했다.
자리에 앉으려는데
쇼핑한 물건인 듯 작은 비닐봉지가 시선을 끌었다. 빨리 갔다 줘, 누군가의
말에 ‘여보세요’ 몇 번이나 부르며 따라갔으나 그녀는 도망치듯
그냥 간다. 나는 급히 다가가 어깨를 토닥였다.
순간, 획 돌아선 그녀의 무서운 눈초리. 멈칫, 머리 칼이 곤두서는 두려움으로 헐레벌떡 돌아와 벌레인 듯 비닐봉지를 던져버렸다.
언제 좇아왔는지 여인은 나를 째려보다가 둘둘 말은 종이로 내 어깨를 탁 내리친다. 그러고도 분을 못 참는 듯 숨을 몰아쉬더니 ‘당신 밥 먹고 그렇게
할 일이 없어?’소리친 후 봉지를 들고 휑하고 돌아섰다. 나는
얼떨결에 어깨에 손을 댔고 놀란 일행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파랗게 질린 내 얼굴을 보신 K선생님, ‘진정해요, 정신을
약간 놓은 사람인가 봐요.’ 내 등을 쓰다듬으며 작은 소리로 위로해 주셨다. 지금도 그녀가 왜 그랬을까? 생각할 때마다 몸이 오싹해진다.
그날, 매섭도록 날카로워 보였던 그 여인의 눈빛은 무슨 사연 때문이었을까? 마음의
상처는 미움과 분노가 되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자기의 아픔을 확대시키는 존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게 분명하다.
‘피해망상증?’ 그 눈은 불안으로 떨고 있었으니까.
선물로
받은 책인데 주제가 무거워 미뤄뒀던 <불안감 버리기 연습>(통증클리닉 원장 오광조)이라는 책을 읽었다. 나는 왜 불안한가? 첫 문장을 의문으로 시작했다. 불안감 지우는 연습, 불안감 바꾸기, 행복한 인생을 위한 감정연습에 대해 쓴 책이다.
불안은 삶과 함께하는
숙명이라고 한다. 읽기 전 그때 그 여인의 불안했던 표정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해봤다. 불안의 원인은 세상 곳곳에 널려 있다.
현대사회 자체 가, 아니, 삶이 불안의 연속이지 뭐.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까, 병에 걸리지 않을까, 교통사고가
나지 않을까, 불량식품이 아닐까. 뭐니 뭐니 해도 자유스럽던
일상이 정지된 코로나 바이러스야말로 가장 힘든 불안이다. 불안은 요람에서 무덤까지란 말도 있다. 별수 없이 맞닥뜨리며 살아가야 하나? 정답을 찾으려고 열심히 책장을
넘긴다.
학문과
경험, 숱한 사례들로 두툼하던 책의 결론은 간단했다. 흔하고
평범하지만 중요한 세 가지로 질문을 던진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가장 중요한 사람은? 가장 중요한 일은?’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을 위해 어느 현자가 말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현재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 인간은 그것을 위해 세상에 온 것이므로
우리는 지금 대하는 사람에게 사랑과 선을 베풀어야 하느니라.’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세 가지 의문>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덧붙였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무엇이 다른가. 따지고 보면 어려울 게 하나도 없구나. 과학이나 철학, 문학, 예술의 궁극적 지향점은 하나가 아닐런지.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가는 “끝이 없는 인간사랑”의 실천이 불안제거의 열쇠라고 이해했다. 역시! 사랑은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책을 덮으며 나는 만족했다.
사랑이
필요했던 그때 그 여인은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러고 보면 불안이란 외부에서 오기보다 마음에서
발생하는 감정일지 모른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면 되는 것인데. 사랑만
나눌 수 있다면 그녀 속에 박힌 알 수 없는 상처는 치유되고 절망의 안개는 서서히 걷힐 수 있으련만. 외모도
차림새도 깔끔했던 그 여인, 그녀가 사랑의 힘을 체험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세
가지 의문” :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그의 사상과 행복을
요약하여 쓴 단편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