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준 장로(종교 칼럼니스트)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
서울에 사는 어느 지인은 유복자로 태어나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랐습니다. 누구나 다 부르는 그 흔한 ‘아버지’를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가끔 남산에 혼자 올라가 숲 속에서 마음껏 소리 높여 ‘아버지!’, ‘아버지’를
연거푸 불러보고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찡 했던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여성 인권운동가들
중에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만 부르는 것은 성 평등사상에 위배된다면서 이제는 ‘하나님 어머니’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고 합니다마는, 그 아버지라는 호칭은
부성애만을 강조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모성애를 과소평가 해서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신 그 아버지는 부성애와 모성애를 아우르면서도 그 것들을 초월한 사랑의 본체, 즉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아껴주시고 위해주시고 사랑하시는 존체(尊體)를 뜻하는 ‘하나님’의
또 다른 호칭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는 어딘가 멀리 그리고 높이 계시는 분, 온 우주를 관장하시는 분,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으로서 감히 우리가 근접하기에는 너무나 크시고 두려워 경외심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맞아들이게 되면 언제나 내 곁에 함께 계시는 분, 언제나 나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아시고, 나를 면밀히 돌보시며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 그리고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시는, 보다 구체적이고 가시적인 사랑의 실체를 체감하게 됩니다.
미국인들 중 대다수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 중 절반 이상이 하나님을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존재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까지는 알고 있지만 그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까지는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 미국 테네시주의 한 도시에 댄 이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 없는 자식이라고 천대를 받으며 그늘진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 지방은 매우 보수적이어서 어른들은 자녀들이 댄과 사귀지 못하도록 단속을 했기 때문에 그는 친구조차 없는 외로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댄이 12살 때였습니다.
그 도시의 어느 교회에 대단히 능력 있는 젊은 목사가 부임해 신앙의 부흥을 일으키고 있었는데, 댄도
그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어느 주일 날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목사님이 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물었습니다. “얘, 너 누구의 아들이지?”
뜻 밖의 질문에 댄은 당황했습니다.
자기가 아버지 없는 소년인줄을 모를 리가 없는데 목사님이 자기를 조롱하는 것 같아 언짢은 기분으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목사님이 대신 대답을 들려 줍니다. “댄!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나님의 아들 답게 살아!”
목사님의 그 말에 용기를 얻은 댄은 그날부터 새로운 희망이 솟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분에 걸맞는 삶으로 변해
갔습니다. 그 소년이 바로 나중에 테네시주 주지사를 두번 역임한 댄 후버 주지사 였습니다.
그가 말년에 쓴 자서전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넌 하나님의 아들이야, 하나님의 아들 답게 살아’라는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나는 주지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진정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고뇌와 번민과 불안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영원한 평안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인간적인 한계에 부딛혀 허덕이는 절망의 심연 속에서 영원한 생명줄을 붙들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중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하나님
아버지’ 이 한마디속에는 우리가 이루 다 표현하지 못하는 수 만 가지의 기도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김 준 장로의 <신앙과 생활>을 추가로 보시려면 아래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