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덕
목사(벨뷰한인장로교회 담임)
우리에게
성탄이 필요한가
누가복음 2:1-14
스크루우지는
성탄절 이브, 꿈에서 세 명의 유령을 만납니다. 첫째는 고독하고
외로웠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둘째는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고 셋째는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면서 쓸쓸하게 끝나는 자신의 장례식을 보여줍니다. 각각의 장면들은 스크루우지에게 지독한 후회와 교훈을 남겼습니다.
그가
죽자 집에서 일하던 여자들은 집에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훔쳐서 자랑하며 웃고 떠듭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이 보인 반응은 슬픔과 애도가 아니라 놀랍게도 기쁨과 자유였습니다. 그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그의 장례식에 이름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신의 묘비를 앞에 두고 울부짖습니다.
그
꿈의 세번째 경험은 미래예측입니다. 미래예측은 숙명론적인 예연(Fore-telling)과
변화를 기대하는 예상(Fore-thinking) 두 가지가 있습니다.
자신의 미래 예측을 놓고 바꾸겠다는 결심과 실천력만 있다면 우리는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다.
다행히
스크루지는 그의 미래 예측을 동기로 현재를 바꾸면서 그의 미래를 바꿀 수 있었습니다. 미래예측은 맞거나
어긋나거나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예측이 오늘 인류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에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람에게는 미래를 아는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진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심지어는 죄를 선택하고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자유까지도 하나님은 허락하셨습니다. 정해진 미래에 끌려가는 운명론적 존재가 아니라
미래를 선택하는 자유를 가진 존재입니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운명론적 예언가들이 있어 왔습니다. 세상에 전쟁과 기근, 흉흉한
일들이 생길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종말론자들이 그 예입니다. 단언하건대 그것은 이교적 영향을 받은
종교적 허구입니다.
혹자는
들쥐ㆍ개미ㆍ개구리 등이 조만간 다가올 장마와 홍수, 지진들을 미리 예견하고 거처를 이동하는 지혜를 발휘한다고
예언 가능성을 말합니다. 그것은 동물 곤충들이 갖고 있는 특별한 감각으로 다가올 재해를 아는 것이지
예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혹자는
타임머신이 생겨서 과거와 미래를 여행하고 경험한다고 합니다. 현재까지의 과학이론에서 말하는 시간 왜곡은
우주여행자의 특별한 물리적 경험이지 실제로 과거와 미래의 사건에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김형석
교수는 ‘왜 우리에게 기독교가 필요한가’라는 책에서 말합니다. 세계에 수많은 종교가 있었지만 대부분 종교 자체에 머물러 있거나 교회국가는 교회 자체가 목적이 되어 있어서
오히려 성경의 진리가 변질된 느낌이라고 합니다.
동양에도 많은 종교가 있지만 ‘열반, 득도, 도덕’ 등의 진리 자체에 머물러 있지 사회를 향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일한 희망은 개신교회가 가르치는 교회관에 있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성경에서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철저하게 영적입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건물이 좋은 교회, 큰 교회’를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함께 있다(마18:20)’하시며 교회의 의미를 그리스도 자신에게 두셨습니다.
개신교회의
영생예측은 현재적이고 실존적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질문에 중점을 둡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하나님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기독교가 필요한 이유이며, 인류에게 성탄이 필요했던 이유입니다. 오직
기독교의 교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만이 그 진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요14:6).
교회는
그 본질이 타자지향적입니다. 에밀 브루너의 말대로 ‘촛불이
탐으로 존재하듯 교회는 선교로 존재합니다.’ 성탄의 ‘위대하고
기쁘고 선한 소식’은 ‘온 백성에게’ 전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려는 기쁨의 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