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목사(루터교 은퇴/미주 크리스천 문인협회원)
보이지 않는 밧줄
‘항구(港口)’를 영어로 ‘Port’라 부르기도 하고 ‘Harbor’라고도 한다.
‘Port’는 자연 지형이나 인공 구조물로 풍랑을 방지하고 선박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춘 곳으로 규모가 큰 산업도시에 있다.
‘Harbor’는 바닷가가 굽어 들어가서 선박이 안전하게 머물 수 있고 화물 및 사람이 선박으로부터 육지에 오르내리기에 편리한 시설을 갖춘 소규모 정박소를 일컫는다. ‘Port’든 ‘Harbor’든 똑 같은 것은 배들이 하나같이 밧줄로 묶여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묶여 있는 것은 우리들도 똑같다 할 수 있다. 정박해 있는 배들은 ‘보이는 밧줄’에 묶여 있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밧줄’에 매여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지구상에는 71억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5대양 6대주에 퍼져 널리 살고 있는데 우리는 북미주에 묶여져 있다. 이 묶음을 ‘구속’(拘束), ‘속박’(束縛)이라 하는데 자유를 억제함을 뜻한다. 감옥을 싫어하는 이유는 자유를 구속하기 때문이다.
미국 건국 초기 독립운동가인 헨리 패트릭(Henry Patrickㆍ1736~1799)의 외침,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란 말은 그래서 유명하다.
‘Liberty’는 구속의 묶음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이 묶음의 언어는 히브리어로 ‘차르’(cha-r)라 하는데, 동사 ‘차라르’(cha-ra-r)에서 왔다. ‘구속하다’혹은 ‘규제하다’란 뜻으로 이 두 낱말 모두 자유와 행동을 제한하고 정지시킴을 의미한다.
우리를 묶어 놓고 있는 이 밧줄들이 전도서 3:2~8에서는 모두 14가지로 분유(分有)하고 있다.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으면 뽑을 때가 있다. 죽일 때가 있으면 살릴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면 세울 때가 있다.
울 때가 있으면 웃을 때가 있고, 애곡할 때가 있으면 춤출 때가 있다. 연장을 쓸 때가 있으면 써서 안될 때가 있고, 서로 껴안을 때가 있으면 그만둘 때가 있다. 모아 들일 때가 있으면 없앨 때가 있고, 건사할 때가 있으면 버릴 때가 있다.
찢을 때가 있으면 기울 때가 있고, 입을 열 때가 있으면 입을 다물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으면 미워할 때가 있고, 싸움이 일어날 때가 있으면 평화를 누릴 때가 있다“고 했다.
이 많은 묶음의 밧줄 가운데 뭐니 해도 풀어 제치기가 어려운 밧줄은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한정된 기간(Period) 동안만 살게 되어 있다.
이 기간이 점점 길어지고는 있지만 칡넝쿨이 제멋대로 뻗어나가듯 수백 년, 수천 년으로 번져 나갈 수는 없다. 결국 이 묶음의 극치는 죽음일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사무엘 선지자는 이것을 ‘우리는 끝에 가서는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 담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고 했다(사무엘하 14:14). 히브리서 기자는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다’라고 했고(히브리서 11:27) 우리는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을 한다고 했다(히브리서 2:15). 종(노예).
이것을 헬라어로 ‘두우로스’(δουλος)라 하는데 ‘노예로 삼다’의 뜻을 지닌 동사‘두우로’(δουλοω)에서 왔다. 노예란 자신의 권리나 자유가 박탈된 채 살아가는 사람을 뜻하는데 로마서 6:7~8에서는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했다.
죄에서의 해방은 곧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죽음에서의 해방을 뜻한다. 이 해방을 헬라어로 ‘판토크라토르(παντοκρατωρ)’라 하고 히브리어로는 ‘샤다이’(Shaddai), 즉 ‘전지 전능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보이지 않는 밧줄’에서 벗어나는 축복을 입었음을 알려준다(이사야 61:1). 그러기에 성경 66권을 우리는 ‘기쁜 소식(유앙게리온ㆍ εὐαγγέλιον)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