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두 목사(오리건 유진 중앙교회 담임)
형제를 만나는 기쁨
오랜만에 오리건을 떠나 미국의 3대 도시 중 하나로 알려진
시카고를 방문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교단의 총회가 개최되는 화창한 가을 10월 말입니다. 미국 최고의 건축가들이 설계한 걸작품들과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들이 솟아있는 도시, 록펠러가 세운 시카고 대학교는70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한 명문 대학교답게 세계 최초로 원자탄 이론을 완성시킨 곳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이곳은 빈민가 출신 무디가 전도 운동을 펼친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고 그가 세운 무디성경학교가 아직까지
운영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가장 설레게 하고 가슴을 뛰게 한 것은 뉴욕의 시라큐스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후 시카고에서 이민변호사로 활약하며 한 한인교회를 아름답게 섬기고 있는 김 변호사님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미국에 처음 도착한 것은 19년전 오리건주 유진이었습니다. 공항 출입구를 빠져 나오는 청년은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것처럼 전혀 낯설지 않은 만남이었습니다.
그는 서울의 Y대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그가 재학하던 80년대의 학원가는 민주화 바람을 타고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었습니다. 그도 데모에 동참했습니다. 졸업장은 받았지만
성적은 좋지 못했습니다.
유학 원서를 내면서 낮은 학업성적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몇 곳에 원서를 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습니다. 오리건 대학교에
원서를 준비하면서 그는 장문의 에세이를 정성스럽게 빼곡히 적었습니다.
그의 성적이 낮을 수밖에 없었던
당시 대학가의 분위기를 충분히 설명하고 만일 자신을 학교에서 받아준다면 실망시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여 좋은 성적을 낼 각오를 하고 있다는 뜻을
적었습니다.
그리고 부인과 함께 간절한 기도를 쉬지 않았습니다. 오리건
주립대학교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은 날의 감격을 그때까지 잊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몇 개월 뒤에 합류한
부인의 신앙은 훌륭한 장로님의 딸답게 성숙해 있었습니다.
그때도 비록 가난하고 작은 이민교회이지만 유진
중앙교회는 유학생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김치도 만들어 나누어주고 학생들이 이사하게 되면
가족처럼 달려가서 돕고는 했습니다.
교회는 기금마련 활동을 계속하였습니다. 매주 목요일이면 대학교에서 조그만 식당을 임대하여 부지런히 음식을 판매하였습니다. 교우들은 자원봉사자로 나섰습니다.
매주 빠지지 않고 새벽같이 식당에
나와서 첫 수업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일을 한 그는 어느 날 식당 일을 마치고 가방을 챙겨 교실로 황급하게 들어가며 웃으며 말했습니다. “옆에 앉은 학생이 제 옷에서 나는 맛있는 음식 냄새를 킁킁 맡을 것 같아요.”
그의 이마에는 구슬땀이 송송 맺혀 있었습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시라큐스 대학원으로 떠나던 날 온
교우들은 소리 없이 울었습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아쉬움,
그 동안 들었던 깊은 가족의 정감이 크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습니다.
시카고를 향하는 발걸음이 이렇게 기쁠 수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시카고의 공원보다도, 멋진 시카고 호수의 야경을 구경하는 것보다도, 주안의
형제를 만나는 기쁨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컸습니다. 장시간의 비행을 하는 동안 마음속에서는 속삭임이
들려왔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1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