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니얼 홍(교육전문가)
대학이 문을 닫았다면
상상해보자.
이번 여름 방학을 마지막으로 전국의 모든 학교가 문을 닫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부모에게 의지하여 용돈을 타 쓰며 소비자로 생활하는데 익숙한 청소년 모두가 오갈 데 없어 사회적 파탄이 일어날
것이다.
200년 전에는 12살이 되면 노동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진입하며 논밭에서의 일손 수요가 줄어 들고, 청소년 노동법이 제정되어 공장에서 10대를 고용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청소년들이 길거리에 나와 배회하는 것을 막기위해 학교가 생겼다. 결국
학교란 취업하기에는 너무 어린 청소년을 당분간 보호하는 탁아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런 탁아소는 말한다. “청소년은 배우고자 하는 욕심이 없기에 우리가 그것을 가르쳐야 한다”라고. 인간 심리의 기초를 오해한 발상이다. 알고자 하는 욕망은 식욕과
같다. 식욕은 누가 가르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 욕구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어릴 적부터 호기심에 가득 차 무엇이든 알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런데, 인간의 유전 인자에 스며있는 호기심이 하나 둘 꺾이는 시점이 있다. 바로
학교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이다.
개개인의 다른 점을 인정하지 않는
교과목을 통해 학생 모두가 시를 분석해야 하고, 삼각함수를 배워야 하고, 개구리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 탁아소에서는 학생들이 그런 것을 배우기를
원하는지, 그것이 그들의 성장과 취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해서는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아무리 배우고 익혀도 시험이 끝나면 모두 잊어먹는 것도 상관없다.
수업
일수를 채우고, 시간을 때우며, 졸업자 머릿수를 맞추면 그만이다. 초등학교 3~4학년이 되면 학생은 자신의 관심 밖에 있는 내용을
탁아소가 억지로 주입시키려는 것을 눈치채고, 배움에 흥미를 잃음과 동시에 배움 자체를 무료한 것으로
두뇌에 인식시키고 만다. 그때부터 도피행각이 시작된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 고등학교를 마치면
대학 진학이 기다리고 있다. 대학에 진학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된다는 말에 놀라는 학생들이
적지 않다. 8학년을 마치고 새 학년이 시작되어 이웃 고등학교로 향하는 스쿨버스가 오면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싣는다. 왜라는 질문은 없다. 대학에도 같은 방법으로
진학한다. 교사ㆍ카운셀러ㆍ부모가 나서서 모든 것을 준비시키고, 학생은
몸만 이동하면 된다.
한 꺼풀 벗겨보면, 대학에 진학하는 가장 큰 이유는 딱히 할 일이 없어서다. 갈 때도
없고 오라는 곳도 없지만, 어딘가는 소속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대학에 간다. 자신이 뚜렷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려는 이유가 아니라 스트레스로부터 일단 피하고 보자는 계산이다. 초등학교 때 시작한 도피행각의 연속인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분명하거나 자기 일로 바쁜 학생은 대학이란 피난처에 예속되지 않는다.
대부분 학생들은 지식과 기술을 익혀
취업을 준비하려고 대학에 진학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의 취향도 재능도
파악하지 못한 채 취업이라는 막연한 미상(迷想)에
빠져있다. 취업이란 뒷면에는 구체적인 분야를 향한 열정이 아니라, 안락한
삶, 인정받는 삶을 추구하는 몽상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그런 삶을 이루기 위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는 관심 밖이다.
대학은 산이 아니다. “왜 에베레스트에 올라가는가”라는 질문에 “거기 있으니까 간다”라는 식의 대답은 대학에 적용할 수 없다. 모든 대학이 문을 닫았다고 상상하면 자신만의 답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