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준 장로(종교 칼럼리스트)
인간됨의 가치
우리나라 속담에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 사람다운 행동을 해야 사람이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외형만 인간의 형체를 갖추고 산다고 해서 사람이 아니고 사람답게 행동하고 살아야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도 사람의 가치를 평하시면서 가롯 유다에게,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이 지니고 있는 육신의 형체와 내면에 있는 비인간적인 어두운 면 등 있는 그대로의 인간 존재를 긍정하거나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기도 합니다마는, 기독교에서는
자연상태 그대로의 인간에게 무조건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어두운 면이 극복되고 밝은 면이 신장되어진 상태 내지는 그렇게 변화될 가능성에 대하여 가치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끊임없이 회개, 변화, 중생, 거듭남, 새사람 등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이 그 존재성에만 머물러 있으면서 가치성으로 지향되지 않은 육신은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결여되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생명체로서의 존재성과 인격체로서의 가치성이 있습니다. 그 존재성만을
놓고 본다면 모든 인간에게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육체라고 하는 외형만 갖추고 활동하는
것만으로 존재의 조건은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치성에 있어
서는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가치성이 반 가치성으로 변질되어 악의 결과를 불러올 때에는 그 존재성 자체가 저주스러워집니다. 고통과 불행만 안겨주는 자식에게, “내가 너를 왜 낳았는지 모르겠다”라고 토로하는 부모의 탄식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하신 말씀도 인간에게서 어두운 면이 밝은 면을 지배하여 그 밝은 면이 사라져 소생될 가능성마저 사라져 인격체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존재에게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 의료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한 채 속절없이 죽어가는 비참한 생명들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슈바이쳐 박사와 자신의 정권 욕을 위해 수백만의 인명을 무참히 빼앗은 히틀러를 어떻게 같은 인간이라고 동등한 가치선상에 놓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이 인간의 형체를 갖춘 존재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인격적 가치성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넓은 간극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생명체로서의 존재성 위에 인격체로서의 가치성이 더해지는 것이고, 가시적인 육신의 형체가 보이지 않는 영적 가치로 채워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인생은 출생시부터 지니고 태어난 존재성을 창조주께서 기대하시는 높이의 가치성으로까지 제고(提高)시키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나 자신이 사람다운 행동을 하고 살기가 힘들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사는 사람을 찾아보기도 쉽지 않은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을 탓
할 수도 있고 시대적 풍조를 원망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가하시는 기준에는 변
함이 없습니다.
언젠가 우리들은 하나님 존전에서 우리의 전 신앙 인격이 평가를 받을 때가 분명히 있을 것
입니다. 그때도 역시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너는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을 뻔했다”와 “너
는 태어나기를 정말 잘했다” 이 두가지 중 어느 하나의 평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죄와 허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래도 옛날 야곱이나 다윗처럼 끝까지 애원
하며 회개하는 영혼을 결코 버리시지 않는 주님의 자비를 바라보며 따라갈 때, “너는 태어나
기를 정말 잘했다”라는 감격스러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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