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시애틀협의회 서기인 김윤숙씨가 지난달 10일부터 2박3일 동안 워싱턴DC에서
열린 청년 컨퍼런스에 참석, 통일에세이 대상을 수상했다. 그녀가
수상한 에세이 <통일 Made in USA>를
싣는다. [편집자註]
통일 made in USA
38선도 임진각도 보이지 않는다. 굶주린 북한 어린이들의 영상도 또 한국을 방문할 때면 매일밤 듣는 북한 뉴스도, 하다 못해 김정은의 부인 리설주의 가십기사조차도 자주 접할 수 없는 이곳, 통일에 대해 고민할 동기를 쉽게 접할 수 없는 이 미국땅 USA에서 감사하게도 2013 청년컨퍼런스가 자극을 준다.
통일에세이를 써보라며. 생각없이 글이 나오겠는가. 오랜만에 아주 오랜만에 3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여고 2학년 소녀를 만나봐야겠다.
밤을 새워가며 기필코 “평화 통일을 위한 자기주장 발표대회”에서 학교 대표로서 월계관을 쓰리라 다짐하며 원고지에 생각을 펼치고 또 펼쳤었건만 지금 어찌 단 한 줄도 떠오르지 않는다.
매일 밤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 돌아오고 또 갔다 오고 벌써 일주일이상을 그랬건만 단 한가지의 생각도 꺼내오지 못했다. 기억나는 것은 그저 “이 어린 소녀 통일을 이루자고 대한민국방방곡곡이 메아리치도록 외치고 또 외칩니다.”라는 마지막구절만 맴돌 뿐.
‘그거로 내가 금상 받았나?’ 머리를 흔들어 본다. 뇌의 탄력은 떨어지고 거미줄만 잔뜩, 답답하고 또 답답하다. 답답하지만 우선 미뤄 둔 통일편지 한통 써놓고 계속 버스를 타야겠다.
이 박사,
캘리포니아에서의 생활은 이제 안정이 되었는지...
소식 자주 전해줘서 고맙고, 한 가지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노트북을 펼쳤어.
지난번 우리가 사무처장님과 가졌던 차세대 간담회가 끝나고 다른 차세대
동생들과 작은 커피숍에서 처음 통일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했었지.
난 사실 충격적이면서도 아픈
전율을 느꼈어. “경제적인 고통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 자녀 셋을 포기하고 둘로 가족계획까지 하는데… 통일에 대한 비용을 생각하면 통일을 그저 환영일색으로만 나갈 수는 없잖아요.”
그 마음이 100% 이해되면서도 한편으로 섭섭했던건 세대 차이일까?
나는 아직도 애국가와 태극기에 눈물짓고, 대한민국이 심장에 새겨져
있는데…
큰 집이 부담스러워 2008년 이번 10월 5일에 애플 전문연구원으로 가는 전자공학 박 박사 가족에게
방을 내주며 시작된 우리 “Seattle Family”는 이 섬 같은 타국에서 내게 많은 의미를 주었어.
박 박사는 다른 동기들과 후배들을 데려와 내게 인사시키고 그러다 우리는 모두 동의해 “Seattle Family”를 탄생시키고 웹사이트까지 만들었는데 동생들의 기발난 아이디어와 신속한 동작에 나는
어리버리였지.
우리는 밤을 새워 가며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고, 배우자상을 이야기하고, 과거의 고통을 꺼내놓기도 하며 가족보다도 더한 정을 쌓았어… 나는
시시때때로 동생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생일과 명절상을 차려 냈었지. 가끔 조언도 하고 강의하던 시절로
돌아가 거실 명강의를 펼치기도 하고… 그런데 그대들은 내게 명강사 아닌 “큰 손”이라 별명을 붙였지.
상 차리고 동생들 돌아가는 길에 음식 싸주고, 일 시키면 용돈 꼭 챙겨 주고. 독거 노인이 80% 이상인 한인 노인회의 성탄 음식을 여학생들과
함께 만들고, 남학생들은 선물을 포장하고, 난 그대들에게 가족이기주의에서
조금은 벗어나 내가 가진 것들을 공유하고 또 베풀려 노력해서인지 그 “큰손”이라는 별명이 싫지는 않았어.
난 큰손 여인들을 항상 존경하고 좋아하니까. 나도 그 대열에 들어갔구나 싶어 내심 나를 그리 봐준 동생들이 고마웠고 스스로 자랑스러웠어. 그 해 2011년 이후로 난 매달100인분의 음식을 만들어 노인회에 가게 되었고 시간이 허락될 때면 함께 가는 동생들이 한없이 고마웠어.
이번 추석 잔치 때도 불고기와 잡채, 전, 나물, 겉절이 등을 만들어 한인 노인회에 가는 데 함께 가 준 동생들이
고마웠어. 이제 고정적으로 함께 봉사해 주는 외부 사람들이 몇 명 생겨 예전보다 힘도 훨씬 덜 들고. 마음을 나누는 것도 전염되긴 하는구나 싶어.
내 사업 계약을 따내기 위해 동생들의 빠른 감각과 테크놀러지로 밤을 새워가며 자료 제작을 도와주었을 때는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어.
“저희들한테 베풀어주신 마음에 비하면
이런 거 아무것도 아녜요.”라도 말하며 환히 웃던 김 박사의 미소는 영원히 잊지 못할거야.
우리의 첫 2세인 박 박사의 아들 재원이가 태어났을 때는 내가 산후조리를 맡고 동생들이 좌우에서 열심히 거들며 우리 “Seattle Family”의 협동과 사랑을 아주 깊이
느낄 수 있었고 우리는 힘들기 보다는 그 생명의 탄생과 피 안 섞인 우리 “Seattle Family” 가족이
얼마나 끈끈히 연결되어 있는가를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경험하는 시간이기도 했어.
이 박사 나는 그렇게 살고 싶어. 내 행복의 열쇠는 사람이라고 믿어. 구체적으로 사람과의 관계라 말해야겠지. 동생들이 가끔 왜 “큰손”께서는 베풀기만 하시고 받지 않으시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었지. 그건 첫번째는 내 마음이 그걸 기쁘게 허락하고 두번째는 동생들은 학업이 먼저지만 난 경제활동을 하기 때문이지.
우리는 지금껏 단 한 번의 싸움도 갈등도 없었지. 우리는 함께 베풀고 나누어 왔던거 같아. 서로 마음을 열고 어떻게든 서로에게 베풀려
했기에 모임이나 단체들이 흔히 작은 경비 때문에 마음이 왜소해지거나 하는 일을 우리는 겪지 않아도 되었고 또한 우리 능력 안에서 서로 배려하며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지.
이 박사, 10여명이 넘는 우리 “Seattle Family”는 나이, 학력, 전공, 경제 상황 등 너무도 다른 배경을 가지고 만났지만, 이후의 그 훈훈한 행복과 사랑은 진짜 가족 안에서도 찾기 힘들 정도였지. 그건
우리가 만든 이 사회 안에서의 통일이었어.
통일이 무얼까? 또 남북한의 통일은 무얼까? 우리가 지금까지 “Seattle
Family” 안에서 주고 받고 또 확산시킨 모든 사랑과 행복이 바로 통일일거야.
전 세계의 사람들은 독일이 통일을 이루며 경제적 고전을 면치 못했다고
부정적인 견해를 펼치기도 하지만 난 그들의 맘 속으로 들어가 찾아보고 싶어. 진정 고통스러웠었는지.
아닐거야.
당시 조금 덜 부유해도, 마음만큼은 부자가 되었을거야. 같은 민족이 담장 너머에서 당하는 고통을 망연자실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것보다는 내 주머니를 조금 조여도 함께
끼니를 나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통일의 이유는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마음이 합쳐지고 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아. 미국 말로 “We can move a
mountain.”이라고나 할까. 동독과 서독이 좋은 예라고 봐.
독일은 통일 후 고물가, 실업과 동독의 자본주의 환경에 대한 적응 등 문제가 많았다고
해. 하지만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위키백과를 참고해보면 결국 독일은 세계 4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고, 수출과
수입 규모는 세계 2위, 연간 개발 원조액 세계 2위에다, 생활 수준도 높고 광범위한 사회장 제도까지
이루었어.
또 독일은 여러 과학 기술 분야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해 독일 연구소는 전세계 연구소 중에서
과학기술이 세계 1위인데다대졸자 초봉은 2012년 기준으로 G7 국가 중 두 번째로 높다고 하니 그들의 통일은 아무도 실패작이라 말할 수 없을거야.
끊임없이 성장해 가는 대한민국을 멀리서 보고 있노라면 독일의 이야기가 아주 멀게 느껴지지 않아. 통일이 이루어진 후 세계 최강대국이 될 대한민국을 상상하면 벌써 어깨가 으쓱들썩해져.
그 날을 위해서라도 우린 멀리서 응원하며 통일 made in USA를추구하고
실행해야 한다고 믿어.
통일의 동기를 찾기 힘든 이 미국 땅에서 통일을 이룬다는 것은 사람의 마음과 따스하게 이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걸거야. 많은 사람이 이민와서 힘들고 외로운데도 가까이 있는 사람조차도 외면하고 주변을 둘러보려 하지 않아. 돌아 보니 우리는 그동안 행복한 통일을 이루며 살아왔어. 그러니 우리는 이미 통일의 실천가이자 리더가 아닐까?
이 박사, 미래 통일 시대의 경제적인 숫자 이전에 이 박사는 이미 마음으로 통일을 실천해온
사람임을 확신하고 자랑스러워하길 바래.
그리고 그런 따뜻한 마음을 두 배로 누리며 살아갈 아들 정호의
통일 시대를 준비해주자구. 학자로서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이 박사의 건승을 기원해. 이 편지 받고 난 뒤 꼭 답장해줘.
이 박사의 가슴에 “Seattle Family”의 통일과 더불어 남북한의 통일이 와 있는지 알고 싶네.
가족들 건강하고 날마다 행복한 통일 만들기 바래.
곧 이어질 “Seattle Family”의 Number 4, 2세의 탄생도 미리
축하하고. 크리스마스 때박 박사네 가족과 더불어 캘리포니아family branch 방문할게. ^^
Bye for now!
-Seattle Headquarter에서 사랑하는 “큰손”-
편지를 마치고
난 뒤 문득 난 더 이상 버스를 타고 종점을 가지 않아도 되겠다는 확신이
섰다. 빛 바랜 원고지에 적혀 있을 많은 글자가 내 마음 안에 아직도 살아 있음을 느꼈고, 지금까지 통일을 염원했고 이루었으며 앞으로도 통일을 실천하며 살아갈 내 모습을 보았다.
“
이 나이든 연사, 사랑과 행복을 베풀고 나누어 화합으로 통일을 대박으로 이루자고 USA 방방곡곡에 메아리 치도록 외치고 또 외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