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우리 동네
공사장에 피는 꽃
하필이면 바로 내 앞에서 정지 판을
들게 뭐람. 속이 타지만 다른 수가 없다. 아예 엔진을 끄고
느긋하게 기다리는 게 낫겠다. 덕분에 주변의 풍경을 찬찬히 돌아보며 호흡을 고르는 것도 좋겠다. 앞만 보고 갈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살아 있는 그림으로 다가온다.
공사장의 사람들, 지나가는 차량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일에 열중이다.
노란 안전모를
쓰고 굴착기를 움직이는 수염이 덥수룩한 이, 작은 삽으로 부지런히 흙을 파내는 땅딸한 남자, 바짝 엎드려 다리 아래를 살피며 부지런히 기록을 하는 젊은이, 무전기를
들고 공사장을 오가는 감독관. 모두가 우리 동네의 낡은 다리를 헐어내고 교각을 세우느라 열심이다.
언뜻 보기에는 무표정해 보이지만 일에 몰두하고 있는 저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이 길을 지날 때면 꼭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를 생각하면 길이 좀 막혀도 짜증이 나지 않는다. 공사장
끝에서 표지판을 들고 있는 앳된 청년이다.
얼마 전 새로 온 그는 흙먼지가 날리는 공사장에서도 언제나
환한 웃음으로 사람들을 맞는다.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일일이 손을 흔들며 운전자들과 눈을 맞춘다. 어느 공사장에서도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아, 그다. 앞차의 운전자가 그에게 물병을 건네주려 한다. 그가 손사래를 치며 엄지를 척 치켜세운다. 두 사람의 모습에 답답하던
길이 시원하게 툭 트이는 것 같다. 나도 차창을 내려 손을 크게 흔들어준다. 청년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욱 밝아 보인다. 그의 미소가 민들레 홀씨처럼
사방으로 날아가 사람들의 마음에 노란 기쁨으로 피어났으면 좋겠다.
산타와 함께
쌀쌀한 밤, 모자를 쓴 그녀의 얼굴이 더욱 작아 보인다. 허름한 옷차림과는 달리
그녀의 눈매는 유난히 곱고 선해 보인다. 그녀는 나를 볼 때마다 큰 딸네 안부를 묻는다.
오래전 잠깐 본 적이 있는 대학생 시절의 아이를 아직까지 잊지 않고 손주들의 근황까지 챙기는 그녀가 참 고맙다.
오늘도 그녀는 싼 포도주 한 병, 과자 한 봉지, 담배 한 갑을 샀다. 이십 불을 받고 지폐 몇 장과 동전을 거슬러주었다. 계산이 끝나자
빈 상자가 있냐고 물었다. 집에서 쓰려니 싶어 탄탄하고 큼직한 것을 내주었다.
그녀는 박스를 들고 가게 안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골고루 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먹을거리가 그득한 상자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으며, 백 달러짜리 지폐를 내밀었다.
“밖에 젊은 부부가 서있는데, 아무래도 먹을
것이 필요한 사람들인 것 같아.”
거스름을 주려고 동전을 세던 내
손이 잠시 멈칫했다. 그녀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날이 아직 춥지? 너희 가게가 여기 있어서
참 좋아.”
커다란 박스를 들고 나가는 그녀를
급하게 불러 세웠다. 눈에 띄는 대로 내가 집어든 것은 카운터 앞에 있는 비프 저키 한 봉지였다. 봉지 하나를 박스 위에 얹어주고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지켜보았다. 명색이
가게 주인이라는 내가 너무 작고 부끄러웠다.
내가 초라하게 느껴지고 부끄러워도
행복하다. 우리 동네엔 진짜 산타가 살고 있으니까. 산타와
함께 웃음을 나누며 정겨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니까.
가장 아름다운 문장
못 보던 것들이다. 큰 길 전봇대마다 하나씩, 뚜렷한 글씨로, 큼지막한 세 개의 표지판이 붙어 있다.
어제 저녁때만 해도 없었는데. 늦은 밤 아니면 새벽에 붙여 놓은 게 분명하다. 보통 광고판보다
훨씬 높은 곳에 반듯하게 단단히 박혀 있다. 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지 않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도대체 누가 밤새 이런 걸 붙여놓았을까.
날이 갈수록 궁금증이 더해갔다. 가까운 곳에 교회가 있어 처음엔 커뮤니티를 향한 교회의 목소리라고도 생각했다.
그런데 그도 아닌 것 같다. 딸아이에게 물었더니 사랑의 고백인 것 같단다. 젊은이들의 사랑 놀음이라고 보기엔 고개가 갸웃해진다.
이 주쯤 지났을까. 어느 날 갑자기 표지판이 보이지 않았다. 그 누가 간밤에 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걸까.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 한동안 마음이 허전했다.
THANK
YOU. I'M SORRY. I LOVE YOU. 전봇대에
붙어 있던 문장이다. 길을 지날 때마다 소리 내어 읽으면 따스한 기운이 차오르곤 했다. 마음에 든 한기를 녹여주는, 언제라도 쉬이 하고 싶은 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세 개의 문장이다.
동네 사람들을 향한 어느 개인이나
단체의 목소리라고 해도 좋고, 누군가의 사랑 고백이라 해도 좋다. 언제
들어도 좋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부드럽게 잇는 이음줄 같은 말이기에.
세 개의 문장이 그 길을 지나던 사람들의 가슴에 오래오래 향기로 남아 있었으면 한다. 누군가
지쳐 있을 때 조용히 건네주는 캔디처럼 내 호주머니 안에도 항상 들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