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경(UW 한국학도서관 사서)
배수아 <에세이스트의 책상>(문학동네 2003)
배수아 작가가 영문 번역판 소개를 위해 시애틀 Elliot Bay
Bookstore에 곧 다니러 온다기에, 가기 전에 숙제 삼아 책을 읽었다.
장편 소설이라고 하는데 200페이지가 채 안되게 짧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시작부터 잘 읽히지 않는 소설이었다. 잘
읽히지 않았던 이유는 여럿이다.
첫째는 문장의 호흡이 길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빗물은 M의 희고 윤기없이 창백한 이마를 지나 감기를 앓은 다음이라
더욱 움푹 들어간 눈두덩과 끝이 약간 아래쪽을 향한 코를 따라 흘러내렸다.”
생각해보면 그다지 긴 문장도 아닌데 정말 길게 읽힌다. 왜냐? 작가의 긴 묘사를 따라가다 먼저 읽었던 부분을 놓치고 자꾸 딴생각을 해서 그렇다. 위 문장을 읽으면서 ‘빗물’을
먼저 상상하기 시작했는데 M이라는 누군가의 이마를 그리는 데 열중하다 무엇이 그의 코를 따라 흘러내렸는지
잊어버리는 현상이다. 이런 자세한 묘사는 심리 묘사가 아닌 이상 별로 흥미롭게 읽히지 않는다.
문장만 긴 것이 아니라 문단도 길다. 한 문단에서 다음 문단까지 보통 2-3 페이지가 지면을 꽉 채우며 숨막히게 이어진다.
짧은 장편인데
절대 짧지 않다고 느낀 데에는 문장과 문단 외에도 ‘나’의
이야기에 임팩트가 될만한 사건이나 이야기가 없다. M이라는 존재가 ‘나’에게 어떤 인물이었는가 의문을 갖고 읽게는 하지만, 그 이야기에 다다르기까지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들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지루하게 이어진다.
그것도 시종일관 매우
무거운 분위기로 더군다나 호감이 쉽게 가지 않는 ‘나’라는
인물의 이야기가.
M과의 독일어 공부를 위해 시작된 만남, 그리고 이어진 미묘한 동성애의 감정,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한 M과의 애매한 결별. 사실 난 이 책을 읽고 딱 떨어지는 뭔가를 찾지
못했다. M이 여자인 것을 깨닫고 나서 그래서 동성애를 다룬 이야기라고 생각했으나 딱히 동성애적인 묘사나
사랑의 깊이를 보여주는 대목도 없다.
독일어를 가르치는 M의
문학성이 조금 두드러진 것 외에. 그래서 그런지 분명 소설을 읽으면서M의 성별을 알고 나서도, 그렇게 읽은 것이 맞는지 책을 덮은 후에도 마음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렇듯 이 소설을 읽는 일은 시작부터 매우 애매모호했다. ‘나’라는 인물이 M과의 결별을 선언하고(M이 남자와 육체적인 성적 경험을 가졌다는 것을 ‘나’가
확인한 후), 그 때문에 ‘나’가 M을 향해 갖는 모호한 마음, 자신도
정의하기 힘든 그런 마음 상태와 비슷하다. 같은 이유로 ‘나’의 수치심으로 괴로워한 부분만 이 소설에서 매우 각인되어 남았다.
과연 M과 ‘나’의 관계에서 저자는 무엇을 말해주고 싶었을까.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M을 만나고 싶었다. 이제
더 이상 M이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리고 그 M은
더 이상 과거에 사랑했던 M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으나 나는 M을
찾아다녔고, M을 그리워했다. M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었다. 한때 나는 수미가 바로 그 M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는 것을 부끄럽게 고백한다. … (중략) M은
몇 마디의 구호나 텔레비전 토론으로 설명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M은 마치 그림이 전혀 없는 책과
같았다. 내가 영혼을 바쳐 읽지 않으면, 나는 M을 영원히 알 수 없게 되는 그런 존재 말이다.”
이해는 가지만 정확히 ‘나’가 M을 통해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 이것이다, 라고 아직도 말하기 힘들다. 그래서 M이라는 인물조차 이니셜로만 표기된 것인지 모르겠다. Mary도 될 수 있고, Margarett도 가능하고, Mimi나 Myong-suk, Mieko도 가능할 수 있는 다면적인
존재 말이다.
책 제목 <에세이스트의 책상>과도 연관해서 이해해 보려고 하지만, 언어의 유희에 심취했던 M과 ‘나’의 공통분모를
빼고는 딱히 잡히는 가닥이 없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내 감상이 매우 모호해 지고, 그 모호함 때문에 길지도 않은 책 한 권에서 작가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해 또한 찜찜하다. 속된 말로 표현하자면 볼일을 보고 싶은데 시원하게 나오지 않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배수아 작가가 힌트처럼 남긴 ‘작가의 말’을 의지해 본다. 이 소설을 드리우고 있던 안개 같은 것이 조금 벗겨지는
것 같다. 내가 이렇게 이 소설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 어쩌면 작가가 의도한 바와 정확히 맞아 떨어진
것 같다는 안도감도 없지 않다.
그녀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녀가
끊어 놓지 않은 긴 문단에 긴 호흡의 문장, 그리고 생소한 비유로 늘어뜨린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어느 순간에 달콤한 멜로디에 의존한 크리스마스 선물용 바이올린 음악의 선율이 참을 수 없게 여겨질 수 있는
것처럼 어느 순간에는 글 속에 담긴 스토리 자체를, 혹은 그런 선명한 스토리에 의존해서 진행되는 글을
내게서 가능한 한 멀리 두고 그 사이를 뱀과 화염의 강물로 차단하고자 했다.”
그녀는 한 마디 더 보탠다. “무엇이라고 불리는가 하는 것은 그 이후의
문제가 될 것이다.” 라고.
작가는 뭔가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을 썼고 그래서 예사롭지 않은 소설이라는 느낌만은 분명하다.
참고로 이 책은 최근에 영어로 <A Greater Music>으로
번역되었는데, 번역자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번역했던 젊은 번역가 Deborah Smith의 작품이라고
한다.
영어로 읽으면 감흥이 어떨지 궁금하긴 하다. 나는
비록 아주 재밌게 읽지는 못했지만, 영어권의 독자에게 좋은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한다. 번역으로 다시 태어나는 언어의 묘미가 문학에는 왕왕 있으니까.
영어 제목은 한글 제목과 전혀 다른 것을 취했다. 소설에는 유난히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었다. ‘나’가 했던 말이
불현듯 생각난다. “나는 M에게서 언어를 배우는 대신에 음악을
배워야만 했었다.” 언어와 음악간의 미묘한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 배수아만 에세이스트의 책상에 앉아 언어를 가지고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을 읽은 우리도 함께 고민한다. 차라리 음악을 들었어야 하나? M이 ‘나’에게 말했듯이, 음악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에 유일하게 인간에게 속하지 않은 어떤 것이어서?
그럼 이니셜 M은 Music? 에이
모르겠다. 작가 낭독회에 꼭 가야겠다. 그녀가 좀 더 정리를
해 줄 것 같다
**소설가 배수아씨와 번역작가 데버러 스미스씨가 11일 오후7시 시애틀 엘리엣베이 서점에서 독자들을 만나는 시간을 가진다. 관련 기사를 읽으려면 아래 링크를 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