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옥씨(오른쪽)가 두번째 북소리에서 가족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북:소리’한인교양 프로그램 자리매김
가족은 그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멍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역으로 가족은 벗어나고픈 곳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지친 심신을 이끌고 어서 돌아가 편안하게 안기고 싶은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처럼 고국을 떠나온 이민자의 삶 속에선 더욱 그러할 테고 결국 “삶의 원천이자
밑절미는 가족”임을 매번 확인하게 된다.
지난 주말인 13일 워싱턴대학(UW) 한국학 도서관에서 열린 두번째 ‘북:소리(Book
Sori)’는 바로 한 권의 소설을 통해 ‘가족’이란 화두를 던져준 자리였다.
이날 강사는 시애틀지역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 한국에서 교양 프로그램인 <시와 수필과 음악과>를 진행하고 있으며 수필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희옥씨가 ‘삶은 소풍이야’라는 주제로 맡았다.
박씨는 이날 방송작가 노희경씨의 자전적 소설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말기 자궁암이란 시한부 판정을
받은 50대 어머니와 엄마를 잃게 될 가족의 애달픔, 투병의 고통 가운데서도
드러나는 어쩔 수 없는 모성애, 그리고 동고동락하다가 이별을 맞게 되는 부부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박씨는 소설의 내용을 낭독하며 공감하면서도 서울에 살았던 중학교 1학년 때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시애틀에서 살며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회복하는 과정에서 암이 발병한 92세의 노모 등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진솔하게 풀어헤쳤다.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지만 본인이 독실한 기독교인이 됐고, 아들이 현재 벨뷰 지역에서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됐으며, 영혼이 자유로운 딸과 며느리 이야기
등도 꺼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이날 자리에는 박씨 아들 내외와 딸도 찾아와 지켜보며 응원을 보냈다.
박씨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가족에 대한 원망도 없지 않았음을 고백했다. 그녀는 늘 아버지께서 어린 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난 것을 원망했다고 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3일장을 치를 때 어머니께서는 나를 ‘독한 년’이라고 불렀고, 어린 나이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시자 이후 ‘불쌍한 년’이라고 불렸는데, 미국 유학 길을 떠나면서 ‘잘난 년’이 되고 싶었습니다.”
박씨는 “일찍 떠나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있었는데 딸을 낳고 돌을
자장가를 불러주면서 진정 어른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결국 일찍 떠난 아버지와 화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에만 그치지 않고 참석자들의 부부간, 부모 자식간 등 가족 이야기를 이끌어냈으며 천상병 시인의 <행복>,
박목월 시인의 <가정>, 황지우
시인의 <늙어가는 아내에게> 등 가족과 관련된 시도 낭송해
행사를 보다 풍성하게 만들었다는 평을 들었다.
박씨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즐거운 소풍 같기만 하겠느냐”면서 “이번‘북:소리’를 통해 나는 어떤 자식이었을까, 혹은 나는 어떤
부모일까라는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본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두번째로 열린 제2회 ‘북:소리’를 통해 이 행사가 시애틀지역 한인 교양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을 해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인이 유방암 수술을 받았고 현재 완치 단계에 있는 미주한인회 서북미연합회 김준배 회장 부부와 신창범 코너스톤 진료소 대표, 이병일 목사, 지소영 시인, 조선용 한인생활상담소 소장,
권다은 영사 부부, 유니뱅크 하주홍 부장, 린우드 최한방 원장 등 60여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토요일 오후 한인들끼리 모여 책에 대해, 가족에 대해, 문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힘든 이민의 삶 속에서 조금이나마 활력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한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이 행사를 마련하고 있는 UW 한국학 도서관의 이효경 사서는 “북소리는 특별한 주제나 형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책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는 것이 취지”라며 “다음달 3일로 예정돼 있는 3회 행사에도 많은 분들이
참석해달라”고 당부했다.
시애틀N=황필립 기자
행복
천상병 시인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시인 천상병은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전기 고문 등을 받고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온몸과 정신이 만신창이가 된 채였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70년 겨울에 그는 갑자기 사라진다. 친구들은 그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유고 시집을 발간한다. 그런데 시집이 발간되고 얼마 뒤, 그는 서울시립정신병원에서 발견된다. 행려병자로 오인되어 그곳에 수용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그는 살아 있으면서 첫 시집을 유고 시집으로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 된다. 그것은 이 시에 나오지 않는 행복 하나다. 1993년 시인이 죽고 나서 진짜 유고 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가 발간되었다.
생전 천상병 시인과 서울 인사동에서 전통찻집 '귀천'을 운영했던 부인 목순옥여사
<제2회 UW '북:소리'의 이모저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