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목사(루터교 은퇴/미주 크리스천 문인협회원)
큰 기쁨의 좋은 소식
-크리스마스에 부치다
우리에게 전해지는 게 너무 반가워 성경은 이 소식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다(누가복음 2:1). 도대체
어떤 기별이기에 기쁨의 좋은 소식일까.
요한 1서 4:9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했는데 성경은 우리를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로 지적하고 있다(에베소서2:11).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이다(로마서6:23).
그러기에 전도서 5:17 절을 보면 우리의 모습을 ‘일평생을
어두운 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다’고 했다. 성경에서 어둠은 항상 죽음을 의미하는데
원어로는 ‘σκότος(스코토스)’라
하고 그 반대가 빛인데 ‘φος(포스)’라
하며 생명을 뜻한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거하지 않는다’고 했다(요한복음 8:12, 12:46).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그에게는 어둠이 없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5). 따라서 어둠의 모습에서 우리를 빼내려는 것이 성경 신구약 66권의
주제다.
노아의 여덟 식구를 홍수에서 건져내려고 홍수가 있기 전부터 노아에게 방주를 짓게 한 것이나(창세기 6:14)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인도한 것(창세기 11:31)에도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모세를 살리기 위해 갈대 상자를 만들어 나일강에 띄운 것이나(출애굽기 2:3-6) 바로의 공주가 떠내려가는 그 상자를 신하를 시켜
가져오도록 해 궁전에서 40년간 양육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끌어내 광야로 인도해 다시 자기
민족을 가나안으로 인도한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의 거룩함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자가 돼라’고
했다(데살로니가전서 4:3). ‘거룩’을 헬라어로 ‘αγιος(하기오스)’라
하는데 이는 동사 ‘구별하다’의 뜻을 지닌 ‘αγιαζω(하기아조)’에서
왔다. 결국 ‘거룩’은
‘이것과 저것이 구별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구별을 뜻하는 ‘Distinguish’란
동사는 반드시 ‘From’이란 전치사가 따른다. 이것과 저것이
분명히 다름을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 인 줄을 알라’(출애굽기 31:13)고 하면서 확연하게 구별을 했다. 이처럼 구별해서 갈라놓은 길 가운데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사망의 길’이다(예레미야 21:8).
우리는 이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의 길에 반드시 속하게 되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육신의 죽음 문제를 피하는 문제가 아닌 오히려 진지하게 맞서 대결하는 관점으로 바라봐야 한다. 문제는
이것이 내 힘으로 가능한 가이다.
종교는 죽음과 죽음 이후에 대한 두려움을 바탕으로 마련된다. 철학도 죽음의 문제를 다루지만, 종교처럼 죽음 이후에 대해 다루지는 않는다. 특히 기독교는 죽음을
핵심의 주제로 삼고 있다.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음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기에 전도서 3:1~2 이하에 ‘천하 범사에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다’고 했다. 사람의
생명 역시 유한하며 한 번뿐임을 상기시켜 준다.
하지만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우리의 삶이 이생뿐만
아니라 예수님 탄생으로 흑암과 사망의 그늘(죽음)에서 꺼내
영원히 살도록 길을 열어주셨으니 이 기쁨이 곧 우리의 큰 기쁨이요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먼 곳으로부터
오는 이 좋은 기별이 목마른 사람들에게 냉수가 되는 계절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