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두 목사(오리건 유진 중앙교회 담임)
“교회 헌법 책입니다”
영산 중앙교회의 교우들은 별로 경험이 없는 젊은 전도사 부부에게 많은 위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배 장로님 내외분의 따뜻한 배려가 그랬고 집사님들의 온화한 성품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훈훈한 추억으로 가슴 한 켠에 남아 있습니다. 마치 천로 역정의 주인공 기독도가 장망성을 어렵게 빠져 나와 숱한 난관들을 극복하고 마침내 광활한 초원에 다다라 큰 위로를 받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긴 겨울 방학이 끝나고 신학기 개강이 되자 하루하루의 일정은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한 주의 수업이 끝나는 금요일 오후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각자 섬기는 교회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마치 썰물이 빠져나가듯이 캠퍼스는 을씨년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1975년, 4년간의 학부가 끝나고 신학전공이 시작되었습니다.
금요일의 마지막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한 손에는 과제물 가방을, 다른 한 손에는 학교에서 입었던 옷가지 등을 챙겨 시외 버스 주차장으로 달려가면 버스는 금방이라도 떠날 듯이 엔진 소리 요란하게 부르릉 거리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버스가 복잡한 시내를 벗어나자 푸른 산하가 눈앞에 나타나고 활기찬 대한민국의 발전해가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서 여간 기쁘지 않았습니다.
70년대 중반의 대한민국은 전국이 요동치며 달려나가는 힘찬 증기선처럼 곳곳마다 개발의 우렁찬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직 포장되지 못한 국도를 달리는 버스는 곡예를 하는 것처럼 운전기사의 능숙한 운전으로 어느새 도착한 곳은 진영읍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가을 햇빛에 샛노랗게 익은 단감을 광주리 가득히 머리에 인 아낙네들이 정겨웠습니다. 문득 아빠를 기다리는 어린 딸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큰 마음 먹고 감 한 줄을 사서 가방에 조심스럽게 넣고 나면 천하를 얻은 것처럼 마음이 뿌듯하였습니다.
한 시간 반 정도의 버스 여행 시간은 다가오는 주일의 설교 제목과 본문을 정하는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경건회 시간에 감동을 받았던 성경 구절이나 설교는 좋은 소재였습니다. 제목과 본문이 결정되면 이미 설교는 거의 완성된 것 같은 기쁨을 맛보곤 하였습니다.
조용한 영산읍 호수를 돌아 정류장에 도착하자 엄마의 품에 안겨 눈망울을 굴리던 딸이 고사리 손을 활짝 펴며 금방이라도 품에 안길 듯이 목을 앞으로 쭉 내밀었습니다.
주일은 참으로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한 주간 동안 떨어져 있던 교우들과의 만남이 즐거웠고 함께 찬송하고 예배 드리는 일은 마치 천국에다도 들어온 것 같았습니다. 배 장로님의 따뜻한 배려가 감사했고 군목 사위를 늘 자랑스럽게 여기며 사랑을 베풀어 주시던 남 집사님의 마음이 따뜻하게 전달되어 왔습니다.
월요일 아침은 이별의 날입니다. 귀여운 딸과 아내와의 이별이기도 하고 교우들과의 이별이기도 하였습니다.
버스가 시내를 벗어나면 곧 전개될 한 주간의 수업 일정이 눈앞에 어른거리기 시작합니다. 가장 신경 쓰이는 과목은 헬라어 문법이었습니다.
헬라어는 영어와 달리 성(性)과 격(格)의 변화가 엄격하였고 특히 5개의 격변화는 초보자에게 혼란스러웠습니다. 각 명사마다 각각의 성이 부여되는데, 그 성에 따라서 관사의 변화가 반드시 일치하였습니다.
남성 주격 단수는 호, 여성 단수는 헤이, 중성 단수는 토, 남성 복수는 호이, 여성 복수는 하이, 중성 복수는 타라는 관사가 반드시 붙게 되어 있습니다. 관사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우리말과 달라서 기를 쓰고 외워야 했습니다.
학생들이 너무 복잡하다고 불평을 하면 선생님은 늘 같은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정확한 진리의 말씀이지요.” 학생들이 즐겨 외우는 방법은 ‘산토끼, 토끼야’라는 동요의 곡에 관사를 대입시켜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눈을 지긋이 감고 부지런히 반복적으로 관사를 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호, 헤이, 토, 호이, 하이 타.” 이어서 소유격 변화, 목격적 변화, 여격 변화까지 부지런히 외웠습니다.
“투, 테이스, 투, 톤, 톤, 톤”, “토, 테이, 토, 테이”, “토이스, 타이스, 토이스”, “톤, 테인, 투, 투스, 타스, 타” 한참을 외우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청년은 저를 힐금힐금 쳐다보더니 머리를 갸우뚱 했습니다. 그리고는 얼른 뒷좌석으로 옮겨 앉았습니다. 아마도 정신 착란자가 옆에 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헬라어 격변화 암기를 거의 마무리하고 교회 헌법 책을 꺼내 읽을 즈음에 버스는 종착역에 도착하였습니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그 청년은 검은 표지로 된 ‘헌법’이라는 책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버스에서 막 내리려는 저를 보고 눈 인사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고시공부를 하시는군요. 제가 미쳐 알아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꼭 합격하시기 바랍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사법고시 헌법 책이 아니고 교회 헌법 책입니다”라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하고 헤어지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