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동인 목사(갈보리장로교회 담임/오레곤ㆍ밴쿠버 한인교회연합회장)
“평화와 조용함”
미국에서 호텔에 투숙할 때 투숙객이 수면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문 밖에 내걸린 “방해하지 마십시오(Do not disturb)” 라는 DND sign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여행 중에 ‘평화와 조용함’을 누리기 원하는 여행객들을 배려한 것입니다.
우리가 휴가 계획을 세울 때, 예약한 숙소에서 Wi-Fi를 사용할 수 있는 지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스마트폰의 인터넷 연결은 이제 우리의 휴식을 박탈하고 혈압을 높이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극지방의 얼음 덩어리가 아닙니다. 이곳에서 보기 힘든 검은 코뿔소 또는 암석이나 사막 지역도 아닙니다. 21세기에 멸종되기 직전의 가장 위태로운 존재는 다름 아닌 “평화롭고 조용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평화롭고 조용한” 길을 약속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님을 따르면 “모든 경건과 존엄 가운데 조용하고 평화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에게 “평화롭고 조용한”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세대는 그들 뒤에 오는 세대의 음악을 싫어했습니다.
나의 어린 두 아들은 종종 내가 즐겨 듣는 조용한 클래식 음악을 낡은 음악이라고 조롱합니다.
모든 새로운 음악은 예외없이 “영혼이 없는 소음”이라고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음악도 두 세대 정도 지나면 “클래식”이 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평화롭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1세기에 “평화롭고 조용한”삶은 로마 당국에 탄압에도 불구하고 결코 사라지지 않는 기독교인의 봉사와 기도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실히 했습니다.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빌4:9)
오늘 아침에 자신의 스마트폰을 진동 상태에 두거나, 친구들에게 조용히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현대적 침묵과 달리 1세기 기독교인의 조용함은 내면의 침묵을 의미했습니다.
중세의 수도원을 방문하신 적이 있습니까? 수도원이나 수녀원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질서는 매일 일정한 시간 침묵으로, 평화와 조용함을 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6세기부터 교회가 수도원 질서를 수립할 때, 수도사들은 침묵에 전념하는 삶을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꼽았습니다. 기독교는 그 시작부터 우리의 일상적인 수면보다 평화와 조용함에 더 우선적인 신앙적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평화와 평온은 그 자체로 막 다른 길이나 끝이 아닙니다. 평화와 조용함은 삶과 세상을 향한 확대된 비전의 수단입니다. 평화롭고 조용한 것의 추구는 우리의 삶에서 구원이 지상에서 영원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선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평화롭고 조용한 것은 진실되고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요1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