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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4-25 16:27
[이기창의 사족] 국민은 물(水)이다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2,450  

<이기창 뉴스1 편집위원>

지리한 긴 여름날 폭염에 시달려서

등줄기 땀에 젖어 베적삼이 척척한데,
상쾌한 바람 건듯 불어 산비가 쏟더니만
한꺼번에 벼랑 위에 얼음발이 걸렸구나.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支離長夏因朱炎(지리장하인주염) 濈濈焦衫背汗沾(즙즙초삼배한점)
灑落風來山雨急(쇄락풍래산우급) 一時巖壑掛氷簾(일시암학괘빙렴) 
不亦快哉(불역쾌재)

(‘마음을 비우는 지혜’ 중에서, 정민 지음·솔刊)

조선말 정조시대의 불운한 개혁사상가이자 실학자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쓴 연작 ‘불역쾌재행’ 20수 가운데 하나다. 20수 모두 ‘不亦快哉(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라는 시구로 끝맺음을 하고 있다.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유배지에서, 개혁군주 정조를 그리워하던 다산은 못 이룬 개혁의 한과 울분, 폐족(廢族)이나 다름없는 자신과 가문의 앞날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곤궁한 삶을 이러한 시에 담아 스스로를 위로했음직하다.     

요즘 세간의 화제 가운데 4·13총선이 빠지지 않는다. 총선이 막을 내린 지 열흘 넘게 지났다. 그런데도 여운이 길다. 그 통쾌함이 여전한 모양이다. 여소야대, 박근혜정부와 새누리당 심판, 더불어민주당에 다수당 지위 부여, 캐스팅 보터(casting voter, 결정투표자)로서 국민의당의 존재감 인정…. 유권자 스스로 일궈낸 통쾌한 변화임에 틀림없다.  정치공학적으로도 대의정치의 본질인 대화와 타협, 그리고 소통이 가능한 정치지형도를 국민이 만들어준 셈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정치권에서는 대화, 소통, 타협의 세 단어가 실종된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런데 20대 총선이 이제부터라도 불통의 정치를 끝내고 상생의 정치, 국민을 섬기는 정치를 하라는 멍석을 깔아준 것이다.        

사람을 쉽게 보거나 하찮게 여길 때 ‘물로 보다’라는 말을 쓴다. 일종의 관용구인데 주로 물의 순하고 가만한 흐름에 빗댄 역설적 표현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이 늘 숨죽이고 있지만은 않다. 어떤 계기와 만나면 잠자고 있던 본능이 되살아난다. 

절대권력의 왕조시대에도 현명한 군주가 늘 가슴에 새긴 경구가 있었다. ‘君舟也(군주야) 人水也(인수야) 水能載舟(수능재주) 亦能覆舟 (역능복주)’의 14자다. 식상할 정도로 들어본 말일 것이다. ‘임금은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 있지만 뒤집어엎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성악설(性惡說)로 잘 알려진 순자(荀子)의 왕제(王制)편에 나온다. 통치자가 정치를 잘하면 국민은 잘 따르지만, 잘못하면 저항을 불러와 정권이 바뀔 수 있다는 얘기다. 모든 이의 생사여탈권을 오로지하고 있던 왕조시대에도 성군으로 추앙받았던 군주는  백성을 어여삐 여겼다. 하물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헌법에 규정하고 있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순자의 가르침은 당태종 이세민(李世民)과 명신 위징(魏徵)에 얽힌 일화로 더욱 널리 알려졌다. 이세민이 누구던가. 당의 실질적인 창업군주로 백제와 고구려 멸망의 토대를 닦음으로써 결과적으로 한민족의 활동공간을 한반도로 축소시킨 인물이었다. 

위징은 바른말과 거침없는 비판으로 툭하면 신하들 앞에서 황제의 위신을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 이세민이 신하들에게 “나의 귀와 눈을 대신해달라”고 요청하자 위징은 순자의 경고를 들려주었다. 위징과 같은 현신들의 보필을 받은 이세민은 중국 역사상 태평성대의 상징으로 꼽히는 ‘정관의 치(貞觀之治)’를 이룰 수 있었다고 역사는 기록한다. 

지도자의 덕목 가운데 하나는 많이 듣는 것이다. 아울러 먼저 말해서도 안 된다고 한다. 주위의 이야기를 충분히 듣고 의견을 수렴하여 결론을 내리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지도자가 먼저 입을 열면 나머지는 입을 닫는다. 누구나 아는 상식이고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의 하나일진대 높은 자리에만 올라가면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다. 

한 신문이 20대 총선 직후인 15, 16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10명 중 7명이 이번 총선결과에 만족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응답자들은 여권참패의 원인으로 대통령과 정부의 잘못(40.0%) 새누리당의 잘못(38%)을 우선 꼽았으며 야당이 잘했다는 답변은 채 10%가 되지 않았다. 

정부와 여당은 이 여론조사의 내용처럼 국민을 물로 본 대가를 이번에 혹독하게 치렀다. 물이 정말 무서운 줄 잊은 오만의 죗값이다. 그 반사이익은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에 돌아갔다. 야당도 오해하지 마라. 마냥 예뻐서 유권자들이 표를 더 많이 준 것이라고 착각하는 순간, 어느 당처럼 훅 간다. 국민은 물이다. 다만 그 물의 흐름이 어떤 모양을 취할지는 정치권에 달려 있다. 

“통쾌하다, 통쾌해!” 국민의 입에서 이런 감격의 외침이 터져 나오는 신바람 정치를 기대하는 일은 꿈에서나 가능할까?

기사제공=뉴스1(시애틀N 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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