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물 유입으로 급격히 변화…궁궐·성문 등 헐리는 아픔도
'문이 닫힌 종로 은방 이층에 있는 한양 구락부라는 다마 치는 집에서 금순이의 오라비 순동이는 께임도리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이곳 서울로 올라온 지 이제 일 년이나 그밖에 더 안 되지만 시골 소년이 제법 서울 아이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박태준 '천변풍경' 제36절 구락부 소년소녀 中
일제강점기 서울, 그러니까 경성은 밀려드는 신문물로 급격히 변화했다. 광화문 앞 마당부터 지금의 서울역까지 나 있는 긴 도로에는 전차가 오갔다.
버스도 경성 시내 중심과 주변 지역을 연결하며 승객들을 실어날랐다. 오늘날 서울 명소를 돌아보는 시티투어버스같은 경성명소유람버스도 도심을 누볐다. 택시들도 조선은행 앞 같은 번화가에서 줄지어 손님을 기다렸다.
청계천 이남쪽으로는 당시 경성 인구의 20%를 차지한 일본인들이 모여사는 남촌(南村)이 형성됐다. 북쪽으로는 한국인들이 사는 북촌(北村)이 조성됐다. 남촌은 경제적으로 우세한 일본인들이 모여지내는 데다 행정 자원 또한 편중돼 한결 쾌적했다.
북촌은 남촌에서 밀려온 한국인들로 인구 밀도가 높아지고 주거 환경이 악화됐다. 그 당시 "북촌의 하늘은 어둡고 남촌의 하늘은 밝다"는 말이 유행했다.
남촌과 북촌이 나뉘어진 것처럼 상권도 한국인 상점가와 일본인 상점가로 양분돼 있었다. 아무래도 신기한 쪽은 서양 문물을 함께 들여오는 일본인 상점가였다. 한국인들은 처음에는 우리가 만든 대륙 고무신이나 동아부인상회 옷감 등을 이용했으나 점차 일본 조미료 등의 유혹에 빠져 하나 둘 일본인 상점가로 이동했다.
남촌에 먼저 생기기 시작한 카페는 1930년대 한국인 상점가가 모여있던 종로에도 생겨났다. 양복에 대모테 안경, 맥고모자를 쓴 모던보이들은 이곳에서 재즈 음악을 듣고 맥주를 마시며 딴스를 추기도 했다.
다방도 커피, 담배, 맥주, 전화 등 신문물을 접하는 접점으로 기능했으며 문학인들의 모임 장소로 쓰였다. 시인 이상도 이 시기 제비다방을 운영했다.
1930년에는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지점이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본점 자리에 들어섰다. 이곳은 1906년 설립된 미쓰코시 오복점 경성출장소가 발전한 형태의 백화점이었다. 백화점은 쇼윈도, 엘레베이터, 레스토랑 등을 갖췄다.
전기도 널리쓰였으며 요릿집이 번성했다. 외식 공간도 크게 늘어 레스토랑에서는 서양요리를 먹을 수 있었고 중국 이민자인 화교가 운영하는 식당에선 자장면과 탕수육도 맛볼 수 있었다. 1920년대 경성에는 호떡집이 200여곳, 청요릿집이 100여곳 있었다.
서구식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열정적이었던 이 시기 모던걸과 모던보이들은 서양 영화를 즐겼다. 모던걸은 단발머리에 발목이 드러나는 짧은 치마, 스타킹에 구두를 신고 핸드백이나 양산을 들었다. 모던보이들은 구레나룻을 기르거나 회중시계를 찼고 나팔바지를 입었다.
◇일제치하 아픔 간직…서대문 단돈 205원에 팔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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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7월 31일 서울 동대문성곽공원 내 디자인센터에 개관한 한양도성박물관을 찾은 시민들이 전시된 돈의문 현판을 관람하고 있다. © News1 한재호 |
경성은 원래 대한제국의 수도이자 한성으로 불리다가 1910년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 병합 후, 경기도청 소재지 경성부로 위상이 격하됐다. 일제는 합병 전부터도 도성 안 공간을 식민통치에 적합한 형태로 훼손했다. 방역과 위생을 이유로 남대문 북쪽 성벽을 헐었으며 숭례문, 소의문, 흥인지문, 혜화문 등 성문과 성벽을 차례로 철거했다.
돈의문으로 불린 서대문은 전차를 복선화한다는 일제의 미명아래 경매에 붙여져 단돈 205원, 쌀로 가치를 환산하면 17가마니 정도에 그치는 형편없는 가격에 팔려 해체됐다. 1915년 서대문 해체 후 새롭게 닦인 길이 지금의 새문안로다.
일제는 성벽과 성문만을 허문 것이 아니었다. 당시 일제는 창경궁을 동물원, 식물원을 갖춘 공원으로 뒤바꿔버렸으며 명칭마저 창경원으로 격하했다. 경복궁은 전각의 대부분이 1915년 헐렸다. 경희궁은 일본인 중학교로 쓰였다.
환구단에는 철도호텔이, 사직단에는 사직공원이, 독립문 옆에는 서대문형무소가 들어섰으며 국사당이 있던 남산에는 일본 신을 모신 조선신궁이 세워졌다.
1920년대 중반에는 식민통치를 상징하는 건축물들이 들어섰다. 지금의 서울도서관인 경성부청을 지나 광화문까지 뻗은 태평로 끝에는 일앙 직속 기관인 조선총독부가 세워졌다. 정동에는 한국 최초 방송국인 경성방송국과 식민지 최고 재판소인 경성고등법원이 지어졌다.
1926년에는 동대문에 경성운동장이 세워졌다. 경성운동장은 지금은 헐리고 없어진 동대문운동장으로 일본 히로히토 일왕의 결혼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2만2700평 부지에 총 15만5000원의 건립비가 투입됐다. 이 정도 규모와 공사비는 당시 동양 제일의 경기장이었던 일본의 고시엔 경기장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일제가 수도로서의 지위를 격하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성은 한국의 수도로 기능했으며 항일 민족운동의 주 무대였다. 경성에서는 1919년 3.1운동이 펼쳐졌으며 민족운동의 중추 기능을 담당했던 신간회가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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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 3.1절을 맞아 최근 비밀 해제된 해외 국가기록 부처의 자료를 28일 공개했다. 이 자료는 영국 국가기록원(TNA:The National Archives)과 미국 국가기록관리청(NARA: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서 보관하던 자료이다. 사진은 1940년대초 학도보급대 동원 모습. (행정안전부 제공) 2013.2.28/뉴스1 © News1 |
1937년 일제가 중국 본토 침략을 개시했을 때는 경성에도 전쟁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모든 생산 요소가 군수 산업에 집중돼 소비재 산업이 위축됐고 전쟁 경비 조달을 위해 돈을 찍어내다보니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경성부민들은 총독부의 배급을 받아 지냈으나 양이 적어 빈궁한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재산을 약탈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극한에 상황에 처했던 경성은 1945년 8월15일 해방과 함께 원래의 이름과 위상을 되찾았지만 1950년 북한과의 6.25 전쟁으로 다시 폐허가 됐다.
기사제공=뉴스1(시애틀N 제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