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춘 한국일보 시애틀지사 고문
조조 닮은 트럼프
많은 사람들이 삼국지를 탐독한다. 나도 어림잡아 대여섯 번을 읽었다.
그 소설에 “내가 세상 사람들을 등질지언정 세상 사람들이 나를 등지게 하지는 않겠다”는 대목이 있다.
유비, 손권과 함께 중국천하를 삼분했던 ‘간웅’ 조조의 말이다. 천하통일 문턱까지 간 그는 황제가 되지 못하고 죽었다. 결국 자기가 세상을 등지지 않고 세상이 그를 등진 꼴이 됐다.
요즘 세상에도 조조 같은 사람이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그중 하나다. 막말을 일삼고 ‘가짜 뉴스’를 천연덕스럽게 트윗하며 ‘미국 제일주의’ 쇄국정책으로 이민자와 난민들을 등 돌리게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젠 외국인들만이 아니라 토박이들까지도 그에게 등을 돌린다. 이번 선거에서 주지사부터 시골 시의원까지 공화당 후보들이 줄줄이 참패했다.
지난해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365일이 지나면서 미국의 국민감정도 많이 달라졌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공화당 후보들의 인기가 예전만 못한 반면 민주당 후보들의 인기는 치솟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공화당 후보들에겐 트럼프가 힘이 아닌 짐이 되고 있다. 내년 재선에서 낙선할까봐 서둘러 은퇴하는 공화당 연방의원들이 속출하고 있다.
워싱턴주 상원에 공화당 티켓으로 도전한 한인 이진영(진영 리 잉글런드) 후보도 트럼프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대로 공화당이 승리한 선거구에서 기록적인 선거자금을 뿌렸고 트럼프와도 분명히 선을 그었지만 민주당 후보에 두 자릿수 비율로 밀렸다. 민주당은 결과적으로 서부 3주(캘리포니아‧오리건‧워싱턴)에서 주지사실과 주의회를 석권하게 됐다.
트럼프 악령은 시애틀 북쪽 한인 밀집 도시인 머킬티오에도 나타났다. 돈을 물 쓰듯 뿌린 사업가 피터 지브가 시의원선거에서 30% 표차로 낙선했다. 그는 지난해 트럼프 선거캠프의 최대 기부자 중 한명이었고, 캠페인에서도 트럼프의 무슬림 박해공약을 앵무새처럼 따라 뇌까렸다. 주민들은 그의 낙선이 트럼프의 분리주의 정책에 대한 대리 심판이라고 했다.
‘이민자 성역도시’를 선포한 시애틀 남쪽 도시 뷰리엔에선 시의원 후보 4명이 트럼프를 모방해 ‘뷰리엔 자부심, 뷰리엔 제일주의’의 기치 아래 연대전선을 형성했다. 트럼프의 성역도시 폐지조치를 지지하는 백인주민들에 영합하려는 속셈이다. 하지만 이들의 득표율은 그저 그랬다. 그중 한명은 현직인데도 히스패닉계 새내기 후보에 고작 2% 포인트 앞섰다.
반면에 역시 이민자 성역도시인 시애틀에선 트럼프를 가장 혹독하게 공개 비판한 제니 더컨 후보가 압승을 거두고 차기 시장으로 당선됐다. 전직 연방검사이자 공개된 레즈비언인 더컨 은 “홈리스 증가, 교통체증 악화, 서민주택 부족 등 고질이 시애틀을 계속 괴롭히지만 트럼프가 그보다 더 큰 골칫거리”라며 그에게 앞으로는 시애틀에 간섭 말라고 경고했다.
가장 큰 이변은 버지니아에서 일어났다. 민주당 지도부조차 ‘잘 못 뽑은 주지사 후보’라고 구박했던 랠프 로담이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이라던 공화당의 에드 질레스피를 9% 포인트 득표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민주당의 한 성전환 여성후보는 현직 공화당 연방 하원의원을 밀어내고 당선됐다. 유권자 중 절반 이상이 트럼프 때문에 이들에 투표했다고 밝혔다.
동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조조는 도주하다 지방현령인 진궁에 체포됐다. 조조는 자기를 의인으로 알고 따른 진궁과 함께 부친의 친구인 여백사 집에 투숙한다. 노인이 술을 사러 간 사이 부엌에서 칼 가는 소리를 들은 둘은 자기들을 죽이려는 줄 알고 뛰쳐나가 가족 8명을 몰살하고 달아난다. 마침 술을 사가지고 오던 여백사와 마주치자 조조는 그도 죽인다.
진궁이 왜 노인까지 죽이느냐고 묻자 조조가 말한 대답이 바로 위의 인용구문이다. 자기의 비행을 끝까지 숨겨 세상 사람들이 자기에게 등을 돌리지 않게 하겠다는 뜻이다. 그의 잔학성에 질린 진궁은 홀로 떠난 후 여포 휘하로 들어가 조조의 적이 된다. 훗날 미국 역사책은 트럼프에 실망한 많은 유권자들이 공화당을 떠나 민주당으로 갔다고 기술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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