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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2-15 13:40
[시애틀 문학-이 에스더 수필가] 튤립꽃사슴길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443  

이 에스더 수필가

 
튤립꽃사슴길

 
“우와, 사슴이다. 엄마, 우리 집에 아기 사슴 밤비가 왔어요.”

막 이사온 새 집에 영화의 주인공 밤비가 나타나자 순간 우리 집은 동물원이 되었고, 아이들은 새처럼 종일 재잘거렸다.

그 해 늦가을 정원 곳곳에 알뿌리를 심으며, 봄 마당에서 사슴과 아이들이 함께 뛰노는 동화 같은 그림을 그려보곤 했다. 이듬해 봄 푸른 기운이 마당을 덮자, 튤립이 초록색 고운 머리를 뾰족뾰족 내밀기 시작했다. 통통하게 볼살이 오른 아이처럼 하루가 다르게 키가 자라고 꽃물이 짙어가는 튤립을 보는 기쁨에 봄날이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갓 피어난 꽃봉오리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말았다. 도대체 밤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이곳 저곳을 살펴보았지만 튤립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수선화가 노란 미소로 위로하려 들었지만, 나의 튤립 타령은 그칠 줄 몰랐다.

다음날 드디어 범인의 정체가 드러났다. 옆집 마당의 튤립을 사슴이 야금야금 먹고 있는 기막힌 광경을 포착한 것이다. 아니, 저것은 우리 집에 왔던 아기 사슴 밤비가 아닌가

이후로 튤립을 지키기 위한 다양한 전략을 짜야 했다. 온갖 궁리 끝에 전자파가 발생되는 막대를 설치해 놓았더니만, 놈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튤립을 맛있게 먹고는 비싼 막대마저 부숴 버렸다. 상황이 여기에 이르자 사슴은 더 이상 귀여운 동물이 될 수 없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도, 관이 향기로운 낭만 속의 짐승도 아닌, 봄날의 기쁨을 무참하게 짓밟아버린 불한당이었다. 튤립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그 해 춘투는 결국 사슴의 승리로 끝을 맺었다.

몇 번의 봄이 지나고, 바다와 숲이 아름다운 시골 동네로 이사를 했다. 곳곳에서 말과 라마, 노새와 염소들을 볼 수 있고, 밤이면 물개들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새벽닭이 아침을 부르며, 화려한 꽁지를 활짝 편 공작이 길가로 나와 차를 세우기도 하는 평화로운 곳이다. 사슴 가족의 한가한 나들이는 이미 흔한 광경이 되었다.   

어느 날 집 근처 도랑에 사슴이 죽어 있었다. 애처로운 주검은 점점 사위어가더니 마침내 마른 나뭇가지처럼 허연 뼈만 남았다

길을 오가며 이를 지켜 보던 아이가 생물 자료실에 보관하겠다며 그 뼈를 수습하자고 했다. 아이와 함께 사슴의 뼈를 상자에 담으며 언뜻 그 위에 겹쳐지는 나의 주검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앙상한 가지처럼 변해 버린 사슴은 그렇게 학교의 자료실로 옮겨졌다.

다시 사슴의 주검과 마주친 적이 있다. 안타깝게도 사슴은 두 눈을 뜬 채 쓰러져 있었다. 얼마 전에 보았던 사슴 가족이 떠올랐다. 두 마리의 새끼를 데리고 소풍 나온 어미 사슴은 정말 행복해 보였는데. 쓰러져 있는 사슴의 몸집이 꽤 큰 것으로 보아 그 어미 사슴일 거라는 막연한 확신에 마음이 무거웠다. 엄마를 잃고 정처없이 헤맸을 새끼들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았다.

곳곳에서 차에 치여 끔찍한 모습으로 스러져 가는 동물들과 차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을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십자가를 보면서, 생명의 끝을 생각해 보곤 했다

그도 자주 대하다 보니 감각이 무디어져 버린 즈음이었다. 그런데도 사슴의 순한 눈망울은 화인처럼 내 안에 찍혀 버렸다. 차마 감지 못한 커다란 눈에는 자식을 잊지 못하는 어미의 한이 서려 있는 듯했다. 눈이라도 감겨 줄 수 있었으면 했다.

오래 전 악당 취급을 받았던 아기 사슴 밤비와 도랑에서 사위어 가던 사슴의 주검과 남겨진 뼈들, 그리고 눈을 감지 못한 채 죽어간 어미 사슴의 모습이 먹먹한 아픔으로 다가온다. 미처 흘리지 못한 어미의 눈물인지 내 안에도 물이 고인다.

어떻게 위로를 해주지. 문득 떠오른 생각 하나. 그 길에 이름을 붙여 주자, ‘튤립꽃사슴길이라고.

정성으로 가꾸었던 색색의 고운 튤립들, 아이들의 예쁜 볼같아서 더욱 사랑스러웠던 꽃들을 이제 그만 기억 속에서 뽑아내어 사슴이 쓰러져 있던 자리에 심어 주기로 했다.

솔솔 바람이 인다. 오랫동안 좁은 내 마음에 갇혀 있던 튤립들은 이제 넓은 세상 양지바른 곳으로 옮겨졌고, 그곳에서 나는 아기 사슴 밤비와 진심 어린 화해를 하였다.

맑은 햇살이 내리는 아침, 튤립꽃사슴길을 지나간다. 색색의 튤립이 끝없이 펼쳐진 들판에서 마음껏 뛰어 노는 아기 사슴들을 그려본다.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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