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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10-26 16:21
[시애틀 문학-이 에스더 수필가] 우 산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502  

수필가 이 에스더

 
우산  

 
가을을 품은 비가 밤새 내리더니 아침 창가에 가을향이 짙다

창문을 열어 집안 가득 가을을 채운다. 옷장을 정리하고 비옷과 우산을 내놓으며 시애틀의 우기를 준비한다. 옷장 구석에 서있는, 둘째가 쓰던 기다란 우산에 눈길이 머문다. 우산은 있을까. 새 것을 마련했겠지. 아이의 손길이 묻어있는 손잡이에 내 손을 얹어 우산을 펼쳐 든다. 낡은 우산 끝에 난 구멍이 아버지의 동그란 안경알 같다.  

파란 하늘이 아름다운 날이었다. 다녀왔습니다 하며 대문을 들어서는데, 아버지의 굵은 음성이 들려왔다. 오오냐. 웬일인지 일찍 들어오신 아버지가 마루에 앉아 코 앞에 무언가를 놓고 열심히 꿰매고 계셨다

세상에, 아버지가 바느질을 다 하시다니….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아버지는 검정색 천으로 된 최신식 이단 접이 우산을 건네 주셨다.

, 이것은 네 것이다. 잃어버리지 말고 잘 써라.”

여섯이나 되는 언니들에게 치여 늘 허접한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서던 막내딸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내신 아버지는 역시 독심술의 대가임에 틀림없다. 아버지는 눈을 찡긋하시며 우산의 띠 부분을 가리키셨다. 거기에는 내 이름 석 자가 한자로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시력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는 대머리 중간쯤에 안경을 걸쳐 올려 놓고, 내렸다 올렸다를 거듭해가며 딸아이의 이름을 그 좁은 띠 안에 흰 당목실로 한땀 한땀 수를 놓으신 것이다.

그 순간 바로 비가 쏟아졌으면 좋았으련만, 야속한 하늘은 며칠이 지나서야 비를 내렸다보물 1호를 들고 나는 자랑스럽게 신작로로 나갔다. 말을 탄 개선장군이 환호하는 군중들을 대하듯 주변의 모든 사물들에게 여유 있는 미소를 보내며,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행진곡 삼아 나는 위풍당당한 자세로 우산행진을 마쳤다

그 후로 아버지는 우산을 세심하게 관리해 주셨다. 우산 살이 부러지거나 천이 해지면 예와 같이 도수 높은 안경을 대머리 중간에 걸어 놓고 손수 바느질을 해서 새 우산처럼 만들어 주시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의 턱 밑에 쪼그리고 앉아 아버지의 꼼꼼한 손놀림을 마음에 꼬옥 담아두었다.

몇 차례 이사를 다니는 동안 내 보물 1호는 낡아서 버려졌고, 이후로는 내 이름이 새겨진 우산을 가져본 적이 없다. 무심한 세월은 아버지의 시력도, 섬세한 손재주도 다 내려놓게 하더니 아버지를 기억 속에 묻어버렸다.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치 못했던 나는 우산 위로 마구 쏟아지던 장맛비 같은 울음을 쏟아 내었다.

그리고 삼 년이 지난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하는 아버지 곁에 엄마가 나란히 누우셨다.  엄마의 옆자리 흙 사이로 아버지 관의 윗 모서리가 삐그시 보였다. 아버지는 이제서야 온 막내딸에게 그렇게라도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나는 엄마 앞에 놓여진 흰 국화꽃을 가져다 아버지가 계신 쪽에 뿌리다가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아버지를 목놓아 불렀다.

맑은 날엔 우산을 고쳐 주고, 비 오는 날엔 스스로 우산이 되어 나를 지켜 주셨던 아버지. 그 분이 이제는 나더러 우산이 되라 하신다. 접어진 우산은 우산이 아니라며, 비바람을  겁내지 말라 하신다

그래, 우산이 때로 좀 찌그러지고 바람에 뒤집힌다 한들 어떠랴. 잠시 접었다가 펴면 되는 것을. 아버지는 아셨으리라. 어린 딸이 걸어야 할 그 길에도 어김없이 세찬 비바람이 불어오리라는 것을.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서 때로는 우산을 접어야만 하는 지혜와 용기 또한 스스로 터득하게 되리라는 것도. 그리고 맑은 날이면 당신처럼 우산을 고치게 되리라는 것도.

아이의 우산을 접고 올려본 하늘에 커다란 우산 닮은 구름 한 점이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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