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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1-03 07:15
[신년 수필]여기열 수필가-귀한 소망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291  

여기열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귀한 소망                                

 
이른 아침 창 밖을 보니 하얗게 무서리가 내렸다. 지붕과 잔디밭, 헐벗은 나뭇가지도 은색 비단옷으로 몸을 감았다. 바깥은 춥겠지만 창문을 사이에 둔 내 마음과 몸은 포근하다. 이런 날이면 어머니께서 하시던 말씀이 귓전에 맴돈다

아침에 서리가 내린 낮에는 햇볕이 따뜻해서 외출하기 좋단다.”

오늘은 날씨가 좋아 기분 좋은 날이 될 것 같다. 운전대를 잡고 가까운 이웃 동네를 한 바퀴 돈다. 경치를 즐기기 위해 한가로운 길을 여유 있게 거닐 듯 다닌다. 어느 길, 어느 골짜기를 가도 해맑은 겨울나무가 아름답다. 온갖 채색 옷을 다 벗어준 무채색의 겨울나무를 나는 사랑한다.

뿌연 하늘을 이고 서 있는 앞 산의 나무들의 꾸밈없는 순수함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언뜻 죽은 듯이 보이나 땅 속 깊이 내린 뿌리에서 쉬지 않고 내년에 피워 낼 색깔의 색소들을 만들어내고 있기에 마른 줄기와 가지들이 두 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서 있는 것이리라.

분주한 내면의 작업을 위해 그 소임을 말없이 감당하며, 우리에게 쉼을 가르쳐주는 겨울나무들. 어느 동양화가 이런 겨울나무의 깊은 생동감과 멋을 그려내랴. 누가 주어진 자리에서 뿌리를 박고 한평생을 살아가는 나무의 충직함을 엿보았다고 말할 수 있으랴.

나는 지난 여름을 LA에서 보냈다. 큰 딸네 집 뒤뜰에는 아름드리 단풍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그 나무는 무성한 잎사귀들로 하늘을 가리고 있어 작은 운동장만큼 그늘이 넓다

식구들은 그 그늘 아래에서 책을 읽는가 하면 한 쪽에선 농구를 한다. 밖에서 일을 하다가 지치면 거기에 와서 쉬기도 한다. 시원하게 앉아서 과일을 먹기도 한다. 때로는 온 가족이 모여 김장도 담근다. 이 단풍나무의 그늘은 가족들에게 편안함과 안락함을 주고 사랑으로 단합하는 시간을 많이 준다.  

어느 날 부엌 창으로 단풍나무 잎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한여름임에도 무성해야 할 단풍잎이 마른 느낌이 들었다. 저녁 때 학교에서 돌아 온 딸에게 물었다. 저 단풍나무가 왜 저렇게 시들시들해지냐? 그러잖아도 나무 치료 전문가가 다녀 갔다고 딸은 대답했다.   

자연을 사랑하는 사위는 특히 수목에 관심이 많다. 뭔가 시원찮아 보여 나무 치료 전문가에게 보인 모양이다. 전문가는 나무의 나이가 백 살쯤 되었다는 것과 수액을 빨아올릴 힘이 부족하다는 진단을 내렸다. 수명이 몇 해 안 남았단다.

과일나무들에는 매일 물을 주면서도 단풍나무엔 물 주는 걸 보지 못했다. 덩치가 큰 나무는 가물어도 항상 건강한 줄 알아, 땅 속에 깊이 뻗은 뿌리가 물을 빨아올리겠지 믿었던 것이리라.

식구들은 모두 애석해 하는 마음으로 나무를 바라봤다. 그 중 제일 안타깝고 불쌍히 생각하는 것은 나인 것 같았다. 나는 손바닥으로 세월에 시달려 거칠어지고 곳곳에 옹이진 나무의 표피를 톡톡 치고 만져 주면서 마음을 털어 놓았다.

언제 그렇게 나이를 많이 먹었니? 힘을 내라. 남은 날, 못 다한 일을 하며 모두를 품고 사랑하며 기쁜 나날을 보내기로 소망을 갖자.”

어쩌면 그건 내 자신에게 한 말인지 모른다. 삶의 끝자락에서 덤으로 살고 있는 내 마음을 나무는 알아 들었을까. 문득 나무는 사람보다 더 깊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수령(樹齡) 100. 나도 지금껏 살아오면서 인간의 온갖 질고를 감내해 왔는데, 나무라고 그냥 무탈하게 살아왔을까. 100년을 살면서 온갖 사람을 보아왔을 테고 슬픔과 기쁨, 아픔도 겪어오지 않았을까

남의 불행을 보고 순수하게 동정하기보다 내 일이 아니라고 우쭐거리는 인간을 볼 때, 그 교활함이 못마땅해도 인내로 내려다 보기만 했겠지. 말 못하는 나무는 무슨 힘으로 아픔과 슬픔을 견디어 냈을까. 자신의 나무 그늘에서 뛰어 놀던 어린아이가 불의의 사고로 다시 보지 못하게 된 안타까운 사연은 어느 나이테에 숨겨 놓았을까

우리는 살면서 희로애락의 감정을 감추지 못한다. 조금 기쁘면 세상을 다 얻은 듯 만면에 웃음이 떠나지 않고, 배신을 당하면 분이 머리끝까지 솟아 폭발한다. 이별의 슬픔은 우리를 세상 끝날 것처럼 몰고 간다. 즐거움을 속으로 삭히는 일도 웬만한 인격으론 절제되지 않는다.

그런데 나무는 어떤가. 주어진 자리에 뿌리를 박고 비바람과 눈보라를 이겨내고 인간의 만용과 혈기에 찬 충동적인 행동을 다 품어준다. 생명력을 저장하고 풍성하게 길러서, 돌아오는 봄을 기다리는 것도 순리라고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나도 새해엔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 마음에 심어놓고 모든 것을 감싸 안으며 원숙한 인격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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