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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4-01-02 12:37
[신년 수필]전진주 수필가-길 찾기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3,214  

전진주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길 찾기

 
겨울 해가 찬란하다. 남쪽으로 기운 황도를 따라 나지막이, 그러나 눈부시게 떴다.

시린 하늘은 유리바다같다. 그 바다에 뿌리를 박은 빳빳한 나목들이 헛그물을 치고 있다풀 먹인 옷 깃을 바짝 세운 소나무들은 동장군께 사열중이다

창밖에는 다만 거미줄이 금실처럼 흔들리고 있다. 쏟아지는 빛살은 부드러운 구름 보자기로 덮어두었던 빗물자국이나 먼지털, 머리카락들을 낱낱이 털어내고 있다. 시야가 훤하건만 눈길 닿는 곳마다 민망하다. 만물이 금빛 태양 아래 속살을 드러내는 이 아침, 문득 밝을 수록 보이지 않는 별이 생각난다

대낮에도 하늘 가득히 떠 있는데 그들을 보지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미처 눈을 뜨지 못해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것이 별뿐이겠냐 마는.  

새해가 되면 소원성취를 빌고, 운동센터 정기회원권을 끊고, 일기장을 사고, 읽지도 못할 책들을 사들였다. 묵은 옷가지며 그릇을 정리하여 다시는 구석구석 쌓아놓지 않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웃고 살자고 마음 먹었고,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해가 바뀔 때마다 그렇게 희망차게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자신에게 거는 말이니까 못 지켜도 그만이었지만 새 도화지 위에 새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 안도의 숨을 돌렸다. 가끔 우리가 깔깔댔던 웃음, 퍼부었던 원망, 흘렸던 눈물은 어디로 갔으며 무엇이 되었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잠자는 건 죽는 연습이라는 게 엄마의 지론이었다. 어떻게 하든 잠을 줄여 한 페이지라도 머릿속에 더 집어넣어야 했다. 별하고 잠은 그렇게 별로 필요 없는 것들이었다. 활동과 노력과 성취와 업적은 태양처럼 빛나는 것이고, 빈둥대거나 친구랑 놀러 다니거나 TV를 보는 것은 담요에 덮인 시루 속 콩나물 대가리처럼 싹수가 노란 것이었다. 그러니 늘 바빴다.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베짱이는 결국 얼어 죽는 존재요, 토끼는 거북이한테 창피를 당해도 싸지 싸.

쉰 번도 넘게 새 도화지를 받아 드는 동안, 멋진 그림을 그렸다고 콧노래가 나오는 세밑은 드물었다. 그리고 광활한 대륙, 아메리카에서 급한 것 없이 태어난 아이들에게도 잠과 별은 쓸데 없다고 다그쳤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불손해졌고, 베짱이처럼 한심해갔다

나그네 인생에 깜깜한 밤이 찾아오면 두렵고 외롭다. 어디서부터 길을 잘못 들어섰을까? 추리작가 마가렛 밀러는, 인생이란 우리가 다른 계획을 세우는 동안 엉뚱한 일이 닥치는 것이라 했다. (<No! 라고 말할 줄 아는 자녀양육> 2001). 불쑥불쑥 끼어드는 불안의 얼굴을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때, 그리고 어둠을 저주하다 한 방울도 더 짜낼 힘이 없을 때, 드디어 멍청히 맨 바닥에 눕게 되면 어둠에 묻힌 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상영이 시작된 극장 안에서처럼 눈이 제 구실을 하게 되는 데는 그저 가만히  기다리는 게 상수다. 동공을 크게 하는 장치는 조물주가 이미 빚어 넣었으니까.

그러나 내면에서 보게 된 별들은 아름다운 보석이 아니었다. 암만 웃고 지내고자 애써도새 길을 떠나자고 다짐해도, 쳇바퀴만 돌리게 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끔찍이 흉한 것들을 별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굳게 닫힌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칭송 받을 만한 일을 좇아 해 아래 수고하는 헛된 일들만이 목숨이 붙어있는 이유라는 거짓, 그 깊은 미로에서 빠져 나오는데 꼭 필요한 나침반이다. 거짓은 성장을 멈추게 한다. 어른이 되려면 아이 적의 것은 버려야 한다. 깊은 잠에 빠지면 정말 죽은 것 같아 보이기도 하지만, 숙면은 성장에 필수다.

까칠한 겨울나무 가지 끝마다 잎눈이 눈꼽만큼 붙어있다. 꽃눈인지도 모르겠다. 그 분간은 내 몫이 아니다. 때가 무르익으면 제가 알아서 피어날 일이다. 나무에 물을 줄 수는 있어도 잎사귀를 꽃으로 바꿀 수도, 사과 꽃을 배꽃으로 바꿀 수도 없다. 말을 끌고 물가까지는 갈 수 있지만 마시게 할 수는 없다는 격언처럼. 새해에는 무엇이 내 몫인지 잘 볼 수 있는 눈이 우리 모두에게 떠지길 기원한다. 그리하여 나머지 몫은 잠잠히, 또한 평화로이 지켜볼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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