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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2-12 09:48
[시애틀 수필-공순해] 선한 인연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2,749  

공순해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장)
 

선한 인연
 

악한 끝은 있어도 선한 끝은 끝이 없단 말이 있다. 선함은 시간을 이어간다는 뜻일 게다.

1970년 새 학기 시작 전 주, 서라벌예대에 원고 받으러 간 적이 있다. 이젠 누구에게 원고를 받으러 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으나, 그날 교무처 실내 바닥에서 문창과 시간표 프린트 주운 일은 생생히 기억난다. 훑어 보니 토요일 1, 2교시 서정주 시학 강의, 3, 4교시 박목월 시학 강의였다.

학기가 시작되자 친구에게 그 시간표를 살짝 보여줬다. 친구의 눈이 빛났다. 1, 2 교시 수업에 우리도 가자. 그 친구 집은 삼선교, 우리 집은 미아리. 서라벌예대는 그때 미아리 고개 위에 있었다. 그리고 마침 우리는 토요일 수업이 없었다.

첫 수업, 강의실에 들어가 앉자 학생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우리를 재빠르게 훑었다. 하지만 신학기였기에 편입생이라 짐작했던지 아무도 우리를 내쫓지 않았다. 서정주 선생님도 맨 뒤에 앉은 우리를 한번 쓰윽 쳐다보고 그냥 수업을 시작하셨다.

그렇게 한 학기가 흘러갔다. 아무도 우리에게 말 거는 학생이 없었고, 시비 가리는 교수도 없었다. 못생긴 두 여학생에게 남학생들이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여학생들은 수업 시작 직전 강의실에 들어가고, 수업 끝나자마자 사라지는 우리에게 말 붙일 기회를 얻지 못했을 수는 있다.

수업은 재미있었다. 서정주 선생님과 박목월 선생님을 비교해 보는 즐거움이었다. 두 분은 확연하게 다른 개성을 가지고 계셨다. 강의실 문 열고 들어오시는 모습부터. 서정주 선생님은 멋쟁이셔서, 단정하게 가르마를 갈라 빗어 넘긴 머리에 양복을 갖춰 입고, 영국 신사의 긴 우산을 들고 들어오셨다

책 또한 연륜이 묻어나는 가죽 가방에서 꺼내셨다. 수업 시작하는 분위기도 조용하셨다. 파이프를 꺼내 입에 물고 창밖을 멀리 내다보시며, 나직나직한 음성으로, 아끼는 물건을 조금씩 조금씩 내주는 아버지처럼 시학을 아끼시듯 조금씩 말씀하셨다.

박목월 선생님은 짧은 스포츠의 부스스한 머리에 잠바를 입고, 책은 보자기에 싸서 갖고 다니셨다. (댁에선 방바닥에 엎드려 발장구치며 연필로 글을 쓰셨다.)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실 땐 활짝 웃고 들어오셔서, 보자기를 풀러 책을 꺼내시며 나직하나 확실하게 말씀하셨다. 공부합시다! 조곤조곤 말씀하셨지만, 내가 아는 건 다 내어 줄게, 하시듯 강의 시간을 꽉 채우며 열강하셨다.

만용(?)은 학기 말 되던 무렵 끝났다. 우리 학교에 출강하시는 박목월 선생님께 들키고 말았던 것이다. 니들 여기 우짠 일이고? 놀라신 선생님은 다신 여기 오지 말그래이, 하셨다. 비실비실 웃으며 위기를 넘긴 우리는 정체가 탄로(?)났다 싶어 그 후론 그 강의실 근처도 얼씬하지 않았다.

이 도강(盜講)의 추억을 랄리팝 핥아 먹듯 가끔씩 꺼내 즐기며 수십 년이 지났다. 그리고 올해 가을,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미당 서정주 탄생 백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할 예정인데 문협에서 행사를 주관해 줄 수 있느냐고. 선뜻 응낙하며, 옥죄었던 마음의 사슬이 부스러져 나가는 듯싶었다.  

수업료도 없는 한 학기 수업을 들었으니 감사의 인사라도 드리고 마쳤어야 했다. 한데 그조차 챙기지 못하고 말았으니 뻔뻔한 학생이 된 듯해 찜찜했었는데, 이렇게 빚 갚을 기회가 생기다니행사 준비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웠다.

행사를 개최한 자제분 내외로부터 살아 생전 아버님께 해드린 것이 없어(왜 해드린 게 없으랴만.) 사후 행사라도 해드리고 싶었단 얘기를 들었을 때, 이 또한 선한 인연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 가는 거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만일 그 옛날 서정주 선생님이 출결에 까다로운 교수여서 우리를 강의실에서 내쫓았다면, 지금 이토록 기꺼운 마음으로 행사를 준비하진 못했을 게다.

60년대 말인지 70년대 초였는지 세계 시인대회가 서울에서 열린 적이 있다. 그때는 국제 행사가 한국에서 열린단 자체가 센세이셔널한 화제였는데, 서정주 선생님은 그 행사에 참석하지 않으셨다. 인터뷰 기사에서 말씀하시길, 외국인 참석자들이 내 시를 모르는데, 그럼 나는 그들에게 시인이 아니다, 시인이 아니면 참석할 수 없지 않으냐, 하셨다.

요즘 나는 내 작품을 모르는 사람들과 접촉할 기회가 되면 선생님의 그 말씀을 늘 기억해 낸다. 내 작품을 모르니 그들에게 나는 작가가 아니다. 글 쓰는 사람은 글로써 존재를 드러내야 한다는 좋은 가르침을 주신 선생님의 명복을 빌며, 마음의 빚을 갚게 해준 선생님의 유족에게 감사 드린다.

또한 <2015 시애틀 한국문학의 밤>에서 만났던 모든 인연이 물처럼 흘러가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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