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死)는 삶보다 보잘것없다. 죽음은 버려지는 것. 과거가 되어버린 생의 흔적들은 고통에게서조차 버림받는다. 이제 겨우 자유로워졌지만 의미는 없다.
멀리서 날아든 날카로운 화살에 생은 쓰러지고 껍데기를 창조한다. 쌓인 시체들 사이로 아직 살아있는 자들의 한숨이 미소처럼 번지고, 프런티어(개척) 정신은 핏물로 범벅이 된다.
그렇다. 프런티어는 애당초 생을 지킨 자들에게만 의미 있을 뿐, 생을 뺏긴 이들에게는 저주 같은 것이었다.
뒤엉킨 인디언 전사들과 백인 병사들의 지옥도는 저주받은 자들에겐 차라리 부럽다.
아군 적군이 어딨나. 생이 아군이고 사가 적군일 뿐. 그렇게 생은 잔인하다. 허나 죽음보다는 찬란하다.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에서 주인공 휴 글래스(리어나도 디카프리오)는 아버지다. 아니, 애비다.
하지만 억울하게 자식을 잃고 난 후 그는 짐승으로 변한다.
회색곰의 공격으로 고장 난 사지를 이끌고 설원을 누비는 그의 모습은 생과 사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한 편의 시(詩)를 쓴다.
어차피 삶은 거대한 서사시이고, 생은 사와 가까워진 가장 처절한 순간에 터져 나오는 감탄사 같은 게 아니던가.
그랬다. 애당초 그곳에 사람은 없었다. 인간도 그저 대자연의 일부일 뿐, 오로지 생과 사만 존재했다.
하지만 잔인한 그곳에서도 순백의 설원은 아름답기만 하다.
애비의 눈빛이 복수심으로 불타오를 때도 가지 끝에 매달린 날카로운 고드름은 영롱한 빛을 뿜어냈고, 설원에 핀 모닥불은 한 송이 꽃이었다.
욕망에 찬 수컷이 암컷과 뒤엉킨 현장에서도 눈발에 가린 풍경은 말이 없었고, 생과 사가 뒤엉켜 눈밭에 뿌려진 피는 차라리 붉은 물감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전부인 듯한 애비의 복수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흐려진다.
마침내 복수의 화신이 된 애비는 적 앞에 서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깟 복수하려고 이 멀리까지 쫓아왔나?"
그래. 삶이란 게 어차피 신의 장난 같은 게 아니던가.
그랬다. 애초에 대자연은 웃고 있었다. 인디언 전사들이 뿌려댔던 화살 밭에서 생과 사가 춤을 출 때도, 회색곰의 공격으로 애비의 몸뚱아리가 갈기갈기 찢어질 때도, 사냥꾼의 마음 속에 악마가 꿈틀댈 때도, 해서 애비가 복수심에 미쳐 날뛸 때도 그는 아름답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복수를 완성할 마지막 순간에 애비는 돌연 이렇게 말한다.
"복수는 내 몫이 아냐. 신의 것이지."
어쩌면 신의 손에도 피를 묻히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새끼를 잃은 애비의 총구가 향한 곳은 복수가 아니었다. 신(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