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도 따라 4등급…"'朴 정부'보다 죄질 나빠" 文 대통령 "공영방송 참담해"…방송개혁 의지
기자들을 성향·회사 충성도에 따라 등급을 매겨 인사·승진 등에 불이익을 준 'MBC판 블랙리스트'가 7일 폭로되면서 이번 문건이 방송개혁 도화선이 될지 주목된다. 적폐 청산을 공언한 문재인 정부의 방송개혁 의지가 강력하고, 방송정책 주무부처 수장에 개혁론자인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이 취임하면서 어느 때보다 지상파 방송사 지배구조 개혁을 위한 분위기는 고조되고 있다.
◇ 'MBC 블랙리스트' 폭로
전국언론노동조합 문화방송(MBC) 본부는 이날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MBC 조합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MBC 카메라기자 블랙리스트'를 공개했다.
MBC노조가 입수한 문서파일은 2건으로 제목은 각각 '카메라기자 성향분석표', '요주의인물 성향'이다. 문건은 기자들을 충성도에 따라 ☆☆(6명), ○(19명), △(28명), X(12명) 등 4등급으로 나눠 노골적인 인물평을 담았다.
특히 최하위 X등급은 '지난 파업의 주동 계층으로 현 체제 붕괴를 원하는 이들'이라는 설명을 달아 '(절대) 격리 필요' '보도국 외로 방출 필요' 등 배제 필요성을 적시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벌어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연상하게 한다.
2012년 170일간 이어진 파업 이후 MBC는 극심한 노사갈등에 휩싸였다. 파업에 동참했던 기자들은 징계 혹은 비제작 부서 등으로 인사발령을 받았다.
이번에 폭로된 블랙리스트에 따르면 실제로 하위등급인 △, X 기자들에게 인사이동이 집중됐다. 김영국 언론노조 MBC본부 위원장은 "이 문건의 용도는 인사권자가 파업에 참가한 이들을 승진에서 배제하고 불이익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노조원들에 대한 탄압의 근거로 보이는 문건이 확인된 것은 처음이라 파문이 예상된다.
MBC노조는 이번 사건이 지난 정권에서 벌어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보다 엄중하다고 강조했다. 박근혜 정부는 보조금으로 문화예술 단체를 통제했지만, MBC 구성원들은 보직발령 등에서 심각한 불이익을 받고 인격권·노동권 등을 침해받았기 때문이라는 것.
회견에 참여한 신인수 법무법인 여는 변호사는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사건이 문화예술 단체를 블랙리스트에 올려 단순히 보조금 지급에 차별을 둔 것이라면, MBC 사건은 더욱 중하다"면서 "법원으로부터 징역 3년을 받은 김기춘 전 대통령실장이 주도한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보다 MBC 사측의 범죄의 질과 양이 더 무겁다"고 지적했다. 신 변호사는 관련자들에 대한 구속수사를 촉구했다.
이날 MBC 카메라기자를 대표해 회견에 참가한 권혁용 영상기자회장은 "블랙리스트는 2012년 파업 후 MBC에서 벌어진 명백한 노동탄압의 실체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라며 "우리는 등급을 매길 수 있는 소고기가 아니다"고 했다. 2012년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X등급을 받고 5년동안 교육연수 등을 전전한 22년차 베테랑 나준영 카메라기자는 "지난 5년간 관리당하고 감시당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살았다"며 "진상을 밝혀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MBC 노조는 오는 9일 문건작성 당시 인사권자였던 김장겸 당시 보도국장, 박용찬 당시 취재센터장 등에 대한 고소장을 서울중앙지검에 제출할 계획이다. 노조는 제보를 통해 이번 문건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노조에 따르면 문서파일의 '메타 데이터'로 확인한 작성자는 이른바 '제3노조'로 불리는 'MBC노동조합'에 속한 카메라기자다. 김 위원장은 "여러 정황을 봤을 때 한 사람이 작성했을 것으로 보지 않으며, 여럿이 조직적으로 업데이트 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MBC 사측은 문건의 존재를 부정하며 강경 대응하겠다는 입장이다. MBC는 이날 공식 입장문을 통해 "회사의 경영진은 물론, 보도본부 간부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문건"이라며 "정체불명의 문건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한 것에 대해 법적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 위원장은 "우리의 답은 간단하다"며 "이 문건을 누가 왜 어떤 목적으로 작성했고, 실제 실현이 됐는지 검찰수사 통해 확인하자"고 응수했다.
◇ MBC, 공영방송 개혁 도화선되나
공교롭게도 MBC 노조가 블랙리스트를 폭로한 시각, 문재인 대통령은 이효성 방송통신위원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었다.
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에서 무너진 게 많은데 가장 심하게, 참담하게 무너진 부분이 방송, 특히 공영방송 쪽이 아닐까 싶다"며 "지난 정권에서 방송을 정권의 목적에 따라 장악하기 위해 많은 부작용들이 있었다"고 MBC를 우회 언급했다. 최근에는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주제로 한 'PD수첩'발(發) 노사갈등이 시사제작국 전체로 번져 기자PD 32명이 제작중단에 돌입한 상태다. 문 대통령은 "이제는 방송을 정권이 장악하려는 일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아야 한다"며 "방송의 독립성을 충분히 보장하고 언론의 자유가 회복될 수 있도록 방송통신위원장께서 각별히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위원장은 "대통령이 지적하신 바를 명심하고 특히 어떤 정권에도 좌우되지 않는 불편부당한 방송을 만들도록 전력을 다하겠다"고 답했다. 개혁성향 언론학자 출신인 이 위원장은 지난 4일 취임 첫번째 일정으로 이용마 MBC 해직기자를 만나기도 했다. 이 위원장은 그 자리에서 "공영방송 정상화 문제가 중대하기에 시급히 바로잡아야 한다"고 의지를 드러냈다. 이에 김장겸 MBC 사장,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MBC이사회) 이사장, 고대영 KBS 사장, 이인호 KBS 이사장 등 지난 정권 '낙하산 인사'로 지목받는 공영방송 경영진들에 대한 인적청산 등 공영방송 정상화 작업이 시작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고용노동부가 이르면 이달 MBC에 대한 특별근로감독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고, 'MBC 블랙리스트' 검찰수사도 경영진들에게 압박이 될 수 있다. 앞서 조준희 YTN 사장이 새 정부 출범 후 사의를 표했고, 지난 4일 우종범 EBS 사장도 돌연 사직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