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겸 감독 하정우는 인터뷰를 마치기 직전 자신의 일상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나만의 일상성을 간직하고 유지하면서 살고 싶다"고 했다. 일상에서 비롯된 감성들을 느끼고 살게 된다면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세상 사람들의 보편적인 감성과 함께 호흡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사는 삶에 대한 고민이 클 것 같았지만, 배우로서가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일상성을 회복하는 법에 대한 고민이 더 컸다는 말이 의외로 다가왔다.
영화 '허삼관'(감독 하정우)은 배우 겸 감독 하정우의 일상성과 관련한 고민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허삼관'은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를 원작으로 아내 허옥란(하지원 분)과의 사이에서 낳은 줄 알았던 첫째 아들 일락(남다름 분)이 11년 만에 남의 자식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원작에서 다뤘던 '매혈'이라는 소재를 과감하게 축소시켰고, 가족 이야기와 부성애를 확대시켰다.
원작을 접한 이들이라면 원작의 배경, 캐릭터, 주제의식을 형성하는 매혈이라는 소재가 축소됐다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 터. 소재가 희미해지면서 원작의 블랙코미디는 자연스레 퇴색됐고, 원작이 갖고 있는 정서 역시 상당 부분 변주됐다는 느낌이다. 이를 가족 드라마라는 장르로 치환한 건 익숙한 것의 소중함을 다시 일깨우고픈 하정우의 의도였다. 나른하고 느릿한 충청도의 한 마을에서 가족들 간의 갈등이 터지고 봉합되는 과정을 통해 일상의 소중한 것을 되돌아 보게 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다.
하정우는 전작 '롤러코스터'로 자신 만의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현했고, 감독으로서의 가능성을 입증했다. 반면 '허삼관'은 대중과의 접점을 찾아가려는 노력이 담긴 작품 중 하나다. 이는 일상성을 고민하는 하정우의 모습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 자신 스스로도 터닝포인트라고 밝혔던 작품인 만큼, '허삼관'에는 특수성 보다 보편타당성을 통해 관객과 소통하고 싶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내 연기와 작품을 보고 관객들이 즐거워 했으면 좋겠다"는 그의 바람이 지금의 '허삼관'을 만들었을 것이라 짐작됐다.
Q. '허삼관' 연출보다 주연을 먼저 제안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연출까지 맡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 A. 허삼관 캐릭터에 대한 관심이 갔던 것 같다. 처음엔 배우로 제의를 받았기 때문에 허삼관이라는 인물이 영화적으로 매력이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서 연출 제의를 그 뒤에 받게 됐다. 캐릭터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연출도 수락하게 됐다.
Q. 원작을 스크린에 옮기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을텐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하다. A. '선택'의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겠다. 어떤 장면을 취사 선택을 하느냐, 방대한 양의 소설을 어떻게 영화로 만드느냐가 가장 큰 고민이었다. 소설의 반을 쪼개서 갖고 온 것이 영화의 전반부에 해당된다. 소설의 후반부는 중국의 색이 많이 묻어나기 때문에 중국의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을 생략하게 됐다.
Q. 중국의 정치적, 사회적 이슈들을 어떤 이유로 생략하게 됐을까. A. 이런 부분들이 과연 영화적으로 봤을 때 재미 있을까 고민됐다. 무엇보다 나는 이 영화를 동화처럼 만들고 싶었다. 위화의 캐릭터들이 사실적이지는 않다. 극화된 부분이 있지 않나. 어떤 분은 소설을 읽고 다른 걸 느낄 수 있고 발견할 수 있다. 내가 읽었을 때는 블랙코미디이긴 하지만 동화적인 판타지처럼 비쳐졌고 굉장히 코미디적이라고 생각했다. 아주 사소한 것에 대한 가치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 중 하나가 만두인데 이것도 우리가 가까이 있는데도 잊고 있는 것들 중 하나라고 봤다. 이를테면 일종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 난 부모자식 간의 관계도 그림자라고 본다. 같이 있지만 인식하지 못하는 것, 사소한 것에 가치를 부여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슈들이나 그런 것들을 제하고 내가 소설을 통해 느꼈던, 소소한 것들의 낭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Q. '허삼관 매혈기'의 캐릭터들은 시대와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반면 영화에서는 시대 배경에 대한 설명이 축소되다 보니 '매혈'에 대한 소재도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A. 영화화를 결심하고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우리 영화의 경쟁력이었다. 그게 허삼관을 둘러싼 가족 이야기와 보편적 드라마, 그리고 주변 캐릭터들의 갈등만을 선택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상업영화가 아닌 예술영화였다면 그런 부분은 어떻게든 넣었을 거다. 상업영화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들을 제외시킨 것 같다.
Q. 초반부와 후반부의 톤이 극명하게 갈린다. 웃음 코드와 감동 코드로 나뉘는 셈인데 이런 연출을 지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A. '허삼관'은 두 편의 이야기를 다룬다. 최대한 전반부는 위화의 문체를 형상화 시키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후반부는 허삼관이 겪는 매혈기만 따와서 새롭게 구성했다. 전반부와 후반부를 어떻게든 용을 써서 결합시키려고 했던 결과물이 그것이었다. 유명한 소설이라서 어떻게든 전개 과정을 가져가려고 했었는데 동시에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Q.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건 초반부 각색 방식이기도 하다. A. 나 역시도 원작에 대한 욕심이 있다. 원작 인물들과 상황들, 이야기를 가져올 수 있는 것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아예 처음부터 결혼을 하고 시작하는 것이 맞는 건지, 한국의 어떤 정치적 이슈를 대입시켜서 만들어야 하는 건지 나도 각색을 여러 번 해보면서 왔다 갔다 했었다. 그러다가 영화의 경쟁력이 무엇인지, 그것에 대해 더 집중해보려 했다.
Q. 원작에서 나타났던 '평등'이라는 주제 의식은 어떻게 변주됐는지 궁금한 부분이기도 하다. A. 영화에서도 원작과 마찬가지로 일락이와 허옥란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 허삼관의 어린 아이 같은 행동에서 나타는 것 같다. 이게 위화가 의미하는 '인과응보'를 말하는 건데 내가 이러한 고통을 받았으니 당신도 똑같이 받야아 한다는 것이라고 꼬장을 부리는 거다. 그런 걸 통해서 허삼관은 자기의 상처를 치유하려 하지 않나. 그게 사람들끼리 모여 살아가는 '균형'인 셈인데 나는 허삼관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려 했다.
Q. 원작의 캐릭터를 캐스팅하는 데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허옥란 역에 하지원을 캐스팅하고 하소용 역으로 민무제를 캐스팅한 이유가 궁금하다. 이외에도 친분 있는 배우들의 출연이 돋보였다. A. 우선 하소용은 전반부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회자가 된다. 그런 하소용을 인지도 없는 배우가 맡게 되면 신비로울 것 같더라. 하지원 같은 경우는 신뢰감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원이 들어와서 중심을 잡아준다면 허옥란이라는 인물의 존재감을 보여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대한 원작을 두 시간 짜리 영화로 축소시키다 보니 캐릭터에 대한 많은 부분이 생략돼 있다. 그래서 더더욱 더 그러한 배우들이 참여를 하게 된다면 관객들이 쉽게 보고 따라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었다.
Q. 하정우 만의 인장이 있지 않나. 이를테면 세 아들이 심씨(정만식 분)네 아이들과 다투는 장면에서 말이다. 아이들의 제스처나 외모 스타일이 범상치 않던데. A. 맞다 심씨네 첫째 아들의 제스처는 내가 시켰다. (웃음) 양 옆 머리카락을 바짝 깎은 아이는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로버트 드 니로를 염두에 두고 그런 스타일을 추구했고, 고양이를 든 아이는 영화 '대부'의 말론 브란도를 염두에 둔 설정이다.
Q. 언론시사회 당시 '허삼관'이 터닝포인트라고 했다. 어떤 의미인가. A. 혼자 만의 위기 의식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래서 '롤러코스터'를 찍게 된 것 같다. 감독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됐던 부분이었고, 그 과정을 거쳐 '허삼관'을 내놓게 된 것이 지금 찍고 있는 영화 '암살'이나 '아가씨' 등 계획 돼 있는 작품에서 좀 더 나은 연기를 할 수 있는 동력을 갖게 한 셈이다.
Q. '허삼관'을 계기로 대중성을 지향하는 감독으로서의 행보를 걷게 되는 것인가. A. '롤러코스터'는 그야말로 내 입맛대로 찍은 영화다. 감독으로서 내가 과연 내 색깔을 드러낼 만큼의 역량이 되냐라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허삼관'은 그것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의 영화다. 내가 정말 나의 취향과 내 것을 드러낼 만큼의거장이 되면, 성장이 된다면 업그레이드 된 '롤러코스터' 같은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배우의 삶도 그랬다. 처음부터 연극으로 시작해서 저예산 영화를 거쳐서 지금까지 오게 됐다. 17년이라는 시간을 생각해봤을 때 '감독이라면 더 걸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든다. 배우로서 관객들에게 힘을 갖기 까지 오래 걸렸기 때문에 감독으로서는 더 오래 걸릴 것 같다.
Q. 앞으로도 코미디 장르에 계속 도전할 계획인가. 감독 하정우가 지향하는 장르가 무엇일지 궁금하다. A. 나는 코미디에 특화된 감독을 꿈꾼다. 워낙 다른 장르는 잘 찍는 감독들이 많지 않나. 연기는 지금까지 이것저것 해왔으니 즐겁게 할 수 있는데 연출 만큼은 코미디 장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우디 앨런, 쿠엔틴 타란티노 식의 블랙코미디 말이다.
Q. 좋은 배우와 감독이 되기 위한 하정우 만의 노력은. A. '건강한 사람으로 살자'다. 그 나이에 맞는 대로 그 나이에 어울리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다. 일상성이라는 것도 갖고 싶다. 배우로서 일상성을 갖는다는 건 굉장히 힘든 것 같다. 언제나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걸 극복하고 싶고 나만의 일상성을 간직하고 유지하면서 살고 싶다. 직업이 특별할 뿐이지 그냥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이다. 보편적인 감성들을 외면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배우로서 감독으로서 연기와 작품 전체를 아우를 수 있지 않을까.
Q. 배우로서 평범한 일상성을 갖는 다는 것이 쉽지 않은 부분일 것 같다. A. 시대의 흐름을 놓치지 않는 거다. 어떻게 살아가는 지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게 우선이다. 어떻게 보면 어렸을 때 친구들이 그런 부분에서 고마운 부분이 있다. 중학교 때 친구들인데 지금도 자주 만난다. 내집 마련 문제, 교육 문제 등 무엇 때문에 고민을 하고 사는지, 여러가지 것들을 같이 호흡하면서 들으면서 살고 유지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가장 사람답고 보통의, 보편적인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이 쉽진 않겠지만 인지하고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Q. '허삼관'을 통해 바라고 있는 건. A. 영화가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다. 물가에 내놓은 자식 같다니까. 하하. 나는 관객들에게 엔터테이너가 되고 싶다. 내 연기와 작품을 보고 재미를 느꼈으면 좋겠다. 그것이 동시대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