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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수필-이성수] 시화전(詩畵展)



이성수 수필가(서북미문인협회 회원)

시화전(詩畵展)
 
늦가을에 한국을 방문했다. 상강(霜降) 절기가 다가오면서 농촌은 추수(秋收)하는 손길이 바빠지고 들판은 황량해져갔다

된서리가 눈처럼 하얗게 내린 날 아침 밖에 나가 보았다. 집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는 어제까지만 해도 샛노란 잎이 무서리를 이기고 서 있었다. 호박, , 맨드라미 꽃잎, 뽕나무 잎 등은 무서리를 맞고 죽어 가는데 은행잎은 노란 옷으로 갈아입고 건재(健在)하였다

그러나 그 은행나무가 오늘 아침에 내린 된서리로 처참하게 패배당하는 것을 보니 세월의 무상(無常)함을 실감할 수가 있었다.

노란 은행잎이 비 오듯 사정없이 땅 위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은행잎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아득히 먼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다. 최근의 기억들은 쉽게 잊어버리는데 77년도 더 되는 옛 기억들은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생각나니 말이다.

나는 일제 강점기 때 초등학교4학년을 다니고 있었다. 학교 운동장 주위에는 여러 그루의 은행나무가 학교의 수호신처럼 서있었다. 가을이 되면 파랗던 잎이 노란색으로 변하면서 다른 나무에 비해 더 아름답게 보였다,

된서리가 온 아침에 학교를 갔다. 운동장 가에 있는 은행나무에서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고 있었다. 일본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된서리를 맞고 떨어진 은행잎을 주어 가지고 와서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특별히 은행잎에 관해서 공부하겠다. 지금 밖으로 나가서 예쁜 은행잎을10장가량 주워 온다. 알았나?”

우리들은 좋아서 환성을 지르며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가 은행나무 밑에 떨어지고 있는 노란 은행잎을 주워 교실로 들어와서 책상 위에 놓았다. 갑자기 교실 안은 노란 은행잎으로 늦가을 정취가 물씬 풍겨 났다. 은행잎은 색깔만 노랗지 아무런 향기는 없었다

만일 은행잎 대신 노란 들국화를 몇 송이씩 책상에 놓았다면 은은한 국화 향기가 온 교실을 진동할 것이다. 선생님은각자 공책에 은행잎을 보고 고대로 그리고 크레용으로 노랗게 색을 칠한다.

그리고 그 밑에 느끼는 글도 써 본다. 그림을 잘 그리고 글을 잘 쓴 사람을 3명을 뽑아 발표하고 칭찬해 주겠다.”하셨다.

잘한 사람을 뽑는다는 말에 다소 긴장을 하는 듯하였다.

선생님! 어떻게 느낀 글을 써야 합니까?” 한 학생이 물었다.

노란 은행잎을 바라보면 각자 생각나는 것이 있을 것 아니니? 예를 들면 파랗던 은행잎이 어느 날 갑자기 서리를 맞고 노랗게 변하고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것을 보고 느낀 생각을 글로 솔직히 쓰는 거다.”

선생님이 설명을 해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다들 고개를 갸우뚱하며 이해를 못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우리들은 즉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예쁜 은행잎 실물을 보고 공책에 스케치를 하고 노란색 크레용을 칠했다. 그리고 보니 그림이 은행잎과 꼭 닮았다. 그 밑에 느낀 점을 글로 적는 데 무어라 써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아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났다. 다른 애들도 무슨 말을 쓸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은행잎 그리는 것은 보이는 실물을 보고 그리기 때문에 쉬운데 글로 쓰는 것은 보이는 실체가 없으니 어려웠다.

나는 주어진 시간 안에 뭐라고 쓰긴 썼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그림을 그린 공책을 선생님에게 제출했다. 쉬는 시간에 선생님이 하나하나 살펴보는 동안 우리들은 조잘대며 밖으로 나가고 화장실도 다녀오곤 하였다.

다음 시간을 시작하는 학교 종이 땡! ! 울렸다.

선생님은 남은 은행잎은 집에 가지고 가서 책갈피에 넣어 두면 벌레가 없어지고, 옷장에 넣어 두면 좀 벌레가 죽으니 어머니에게 드리라고 했다.

선생님은 쉬는 시간에 그림을 잘 그리고 글을 잘 쓴 학생 3명을 미리 뽑아 놓고는 너희들이 그린 은행잎과 밑에 글을 내가 유심히 들여다봤는데 그 중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학생 사람의 이름을 부르겠다.”

이 말에 분위기는 조용해지고 누구 이름을 부를까 관심이 쏠렸다. 선생님은 뜻 밖에 내 이름을 제일 먼저 불렀다. 나는 당황하였다. 내 뒤로 2명의 이름을 더 불렀다. 선생님은 나 보고 앞으로 나와서 큰 소리로 읽으라고 하였다

나는 겸연쩍은 마음으로 글을 읽었다.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또박 또박 낭독했던 기억이 났고 특히 여학생 애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나머지 두 학생도 나처럼 낭독하였다.

그리고 교실 뒤 게시판엔 내 공책을 비롯하여 잘 쓴 두 애들의 공책이 진열되었고 반 애들이 열심히 읽었다.

지금 생각하니 77년도 더 되는 옛날 일본 식민지 교육을 받던 시절이지만 초등학교 4학년 교실에서 현장 학습을 통해서 노란 은행잎을 그리고 바로 그 밑에 은행잎에 관한 생각을 글로 쓴 이른바 글과 그림이 하나가 된 시화전(詩畵展)을 처음 체험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비록 간단하고 초보적이지만 하나의 주제로 그림을 그리면서 미술을 배우고, 글을 써본다는 것과 잘 쓴 학생을 장원, 금상, 은상을 주듯 칭찬해 백일장을 체험케 한 것만으로도 훌륭한 수업이었다고 생각한다.

고향집의 은행나무에서 떨어지고 있는 샛노란 은행 단풍잎은70년도 더 되는 그 옛날 그대로이다. 그 잎을 소재로 어린 초등학생이 체험했던 시화전은 영영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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