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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창의 사족] 후회를 치료할 명약은 없다



<이기창 뉴스1 편집위원>

공자에게 제자 자공(子貢)이 물었다. 국정의 요체가 무엇이냐고. 공자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했다. ‘병(兵)’ ‘식(食)’ ‘신(信)’, 세 가지를 차례로 들었다. 요즘 말로 자주국방, 식량자급, 국민신뢰쯤 되겠다.  


자공이 다시 물었다. 불가피하게 셋 중에서 하나를 버린다면? 공자는 군대를 우선 꼽았다. 자공이 또 물었다. 하나 더 포기한다면 무엇이냐고? 공자는 식량을 포기했다. 결국 신뢰만 남은 것이다.

공자는 덧붙였다. “사람은 누구나 죽게 마련이다. 그러나 백성의 신뢰가 없으면 나라는 존립할 수 없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자고개유사 민무신불립).” 공자는 백성을 하나로 묶는 힘이 신뢰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공자는 백성의 신뢰를 받는 국가는 평소 군대가 없어도 위기 때 단결하고, 굶주림도 극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요즘 우리사회가 분노로 부글부글 끓는다. 허탈감과 절망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가습기살균제’ 사망사태와 마카오 원정도박으로 수감된 화장품업체 ‘네이처리퍼블릭’ 회장 정운호의 ‘전방위 로비’ 파문이 일으킨 분노요 허탈감이다. 모두 국민의 믿음을 저버리는 사건이다. 관련 당사자들은 그야말로 염치를 모르는 것 같다. 

시민단체들은 "가습기살균제 사고로 현재 확인된 사망자만 146명이고, 작년에 신고되어 조사 중인 사망자 79명, 올해 신고된 사망자 14명 등을 포함하면 239명"이라면서 "통계적으로 추정되는 피해자의 숫자는 최대 수십만명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사태의 심각성이 이러한데도, 지난 12일 국회에 나온 주무부처 장관이라는 사람의 발언은 타오르는 국민적 분노에 기름을 끼얹었다. 심상정 정의당대표가 “장관은 도대체 뭐 했나. 환자들은 만나고 다니셨나”라고 질문하자, 윤성규 환경부장관은 “왜 제가 만나야 되느냐, 의사가 만나고…”라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 말에 아연실색한 사람이 많았을 것 같다. 제조·판매업체야 돈에 눈이 멀었으니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국민의 환경복지를 책임진 사람의 그런 자세는 공분을 사고도 남음이 있다.  환경부 홈페이지 장관 인사말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환경복지는 국민 행복의 전제 조건입니다. 우리 국민이 온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박근혜 정부 기간 내에 환경복지를 선진국 수준에 근접시키겠습니다.” 이런 다짐은 그냥 빈말이었나 보다. 

피해자를 만나는 일이 마치 장관의 책무가 아니라는 태도는 우리를 슬프게 만든다. 오히려 대통령을 대신해서라도 피해자들을 찾아다니며 호소를 듣고 아픔을 조금이라도 나눠가지려는 자세가 올바른 마음가짐이 아닌지 되묻고 싶다. 

양심의 보루로 마지막까지 남아 있어야 할 법조계의 신뢰가 또 무너지고 있다. 간헐적으로 터져 나온 그동안의 비리에도 애써 신뢰의 손길을 거두지 않으려던 국민을 한없이 절망에 빠뜨린다. 

판사 출신의 여자변호사(최유정)와 검찰의 최고 엘리트그룹이라는 특수부를 거친 검사장 출신의 변호사(홍만표)가 정운호를 위해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앞으로 가려질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건네진 천문학적 액수의 수임료는 보통사람의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의뢰인, 법조브로커, 전관(전직 판검사), 현직 판검사로 이어지는 의혹의 사슬에 국민의 한숨이 크다. 전관의 영향력이 작용했는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다. 오죽하면 법조3륜이 아니라 브로커까지 포함해 ‘법조4륜’이라는 비아냥마저 나오게 됐는지 안타깝다. 

지난 88년 이송 도중 탈주해 인질극을 벌이다가 경찰에 사살된 지강헌 사건이 떠오른다. 주범 지강헌의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절규가 머리에 맴돈다. 지강헌 일당은 흉악범이 아니라 잡범이었다. 그런데도 보호감호제 때문에 형기를 마친 뒤에도 보호감호처분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과 500만원을 훔친 자신들보다 70억원을 횡령한 전경환의 형기가 더 짧다는 사실에 억장이 무너져 탈옥을 시도했었다. 정운호 로비사건은 결국 30년 전 지강헌의 절규와 맞닿아 있는 셈이다.  

이런 옛말이 있다. ‘착한 이가 부유해지는 것은 축복이지만, 악한 자가 부유해지는 것은 재앙이다.’ 이 말에는 하늘의 심판이 전제로 달려 있다. 서글프지만 하늘도 두려워할 대상이 못되는 것이 요즘 세태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 세상이니 말이다. 몇 년 전 설문조사에서 왜 고교생의 절반 정도가 ‘10억원이 생긴다면 감옥에라도 가겠다’고 응답했을까.  

염치와 분수는 사람노릇에 필요한 최소한의 덕목이다. 신뢰의 바탕이기도 하다. 염치가 없다는 말은 탐욕스럽고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의미다. 염치를 아는 사람이 분수도 지킨다. 염치가 없으면 악을 악으로 보지 못한다. 마음의 눈이 먼 자는 의로움 또한 보지 못하는 법이다. 세상에 후회를 치료할 명의나 명약은 없다고 한다. 마땅히 내려놓아야 할 때 내려놓을 줄 알아야 후회가 덜하다. 염치와 분수를 아는 이들은 그때를 안다. 

계절의 여왕 5월, 이 좋은 계절이 마냥 답답하고 울적하다. 그 시름을 맑은 시로 달래보자. 고려 공민왕의 왕사 나옹(懶翁)화상이 남긴 선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탐욕도 벗어놓고 성냄도 벗어놓고        聊無怒而無惜兮    (요무노이무석혜)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기사제공=뉴스1(시애틀N 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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