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월 28일 (금) 로그인 PC버전

시애틀N 최신 기사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2021년 1월 시애틀N 사이트를 개편하였습니다. 열람하고 있는 사이트에서 2021년 이전 자료들을 확인 할수 있습니다.

시애틀N 최신 기사를 보시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이유식의 시선] 누가 새누리당 치즈를 옮겼을까



이유식 뉴스1 주필

# <변화는 항상 일어나고 있다. 변화는 치즈를 계속 옮겨놓는다 / 변화를 예상하라. 치즈가 오래된 것인지 자주 냄새를 맡아보라 / 변화에 신속히 적응하라. 사라져버린 치즈에 대한 미련을 빨리 버릴수록 새 치즈를 보다 빨리 발견할 수 있다 / 자신도 변해야 한다. 치즈와 함께 움직여라 / 변화를 즐기라. 모험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와 새 치즈의 맛을 즐기라 / 신속히 변화를 준비하고 그 변화를 즐기라. 변화는 치즈를 계속 옮겨놓는다>     


2000년 국내에 번역된 스펜서 존슨의 책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에 나오는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이다. 1998년 미국서 출간된 이 책은 생쥐와 꼬마인간, 치즈와 미로를 등장시킨 우화로 전세계 수천만 독자들의 생각과 삶을 전환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국내서도 크게 화제가 됐다. 저자는 제목에서 언급한 치즈가 직업, 인간관계, 재물, 자유, 건강, 명예, 취미활동까지를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라고 말했지만 권력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2004년 4월 23일 열린 한나라당(새누리당 전신)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된 박근혜 의원은 수락연설을 통해 “힘들다고 휘어지거나 굴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바쳐 당을 살려내겠다”며 “천막을 쳐서라도 당장 당사를 옮기겠다”고 위기극복 의지를 표시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불법 대선자금 수사로 밝혀진 ‘차떼기당’ 오명과 노무현 대통령 탄핵파동에 따른 역풍으로 20여일 앞으로 다가온 17대 총선에서 80석 안팎의 군소정당으로 몰락할 것이라는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당 사무처는 ‘천막을 쳐서라도’ 발언을 흘려들었지만 박 대표는 그날 밤 곧바로 자신의 뜻을 밀어붙여 다음 날부터 컨테이너와 천막으로 급조한 이른바 ‘천막당사’에서 고난의 대장정을 시작했다. 정치쇼라는 비판을 뒤로하고 박 대표는 “부패·기득권 정당에서 벗어나겠다는 우리의 진심을 국민들이 받아줄지는 미지수지만 진정으로 과거를 반성하고 새 출발하려는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한번만 기회를 달라”며 선거를 진두지휘했다. ‘붕대투혼’이란 말도 나왔다.  

4·15 총선의 두껑을 연 결과 한나라당은 개헌저지선을 훌쩍 넘는 121석을 얻어 도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집권당인 열린우리당 152석에 크게 뒤졌지만 이것이 보수정권 재집권의 기틀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박근혜 대통령은 4·13총선에서 새누리당의 참패를 부른 민의가 지난 3년의 국정운영에 대한 심판이 아니냐는 지적에 ‘민생을 외면한 양당 체제의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심판 및 변화 욕구가 3당 구도를 만들어준 것’이라는 인식을 보여줬다. 지난달 26일 청와대서 가진 편집·보도국장 간담회에서다. 박 대통령은 심판론 질문이 다시 나오자 “국정운영이 잘못됐다는 지적이 있는 것도 안다”고 답했지만 3당 대표 회동 및 여야정 협의체 추진 등으로 핵심을 비껴갔다. 하려던 일이 국회에 다 막히는 바람에 엄청난 한이 될 것 같다는 소회도 토로했다.     

야당은 대통령의 인식이 안일하다고 즉각 반발했지만 대통령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됐던 것이다. 4·13 직후부터 청와대와 친박계 주변에서 “이번 총선은 공천 막장극을 벌인 새누리당에 대한 심판이지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아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왔기 때문이다. 결국 ‘야당의 국정 발목잡기와 여당의 공천파행이 3당 체제를 만든 것이며 소통과 협력으로 국정을 잘 이끌어가라는 게 민의’라는 게 충성스런 참모들의 보고서 요지였을 것이고 박 대통령은 큰 거부감 없이 이 논리를 받아들인 듯싶다.       

    
새누리당 20대 총선 당선자들이 지난달 26일 당선자대회에서 총선 참패를 불러온 국민의 뜻을 겸허히 받들겠다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하지만 각오도 잠시, 곧바로 친박 비박간에 패배의 원인을 둘러싼 날카로운 설전이 벌어졌다.   © News1

# 같은 날 열린 새누리당 당선자 대회는 “계파와 정파에 매몰된 작은 정치를 극복하고, 민심을 존중하는 '민심정치'를 펼치고 민생과 경제를 최우선하는 명실상부한 '국리민복 국회'를 만들겠다”는 결의문을 내놨다. 하지만 곧바로 친박-비박 간에 원색적인 패배 책임공방이 오가면서 얼굴만 붉힌 채 대회를 끝냈다. 

새누리당은 지금도 보수 집권당이 원내 1당의 지위마저 빼앗긴 초유의 상황, 절체절명의 위기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리더십은 실종상태고 조직은 와해됐으며 미래권력도 보이지 않는다. 12년 전 천막당사 상황 때는 그나마 선장과 결기(決氣)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마저 없다. 부각되는 것은, 박 대통령을 중심에 둔 친박-비박의 갈등뿐이다.      

그나마 눈길을 끄는 것은 3일 실시되는 원내대표 경선에 나선 후보군들의 출사표다. ‘박근혜 마케팅’이 사라진 자리에 계파청산, 수평적·균형적 당청관계, 협치, 소통, 혁신 등의 수사가 넘쳐났다. 기존의 틀을 깨고 판을 다시 짜는, 정치적 상상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대반전의 감동(感動) 처방이 나와야 한다는 인식이 새누리당의 대세로 자리잡는 것은 박근혜 정부의 원만한 매듭을 위해서라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 2012년 12월 치러진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1577만표 넘게 얻었다. 반면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지역구 투표에서 920여만표, 정당투표에서 796여만표를 얻었다. 대선과 총선이 다르고 투표율 차이도 크지만 새누리당 박후보를 지지했던 보수성향 표 가운데 600만표 이상이 3년여 만에 지지를 철회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표심이 박대통령의 일방독주식 국정운영에 대한 심판인지, 새누리당의 공천 막장극과 후진적 계파갈등이 부른 염증인지는 좀 더 따져봐야겠지만, 이들의 보수적 성향이 최근 몇 년간 크게 바뀌었다는 증거는 없다.     

서두에 철지난 스펜서 존슨의 치즈 우화를 꺼낸 것은 변화를 거부하고 익숙하고 편안한 것에 안주해온 ‘웰빙정당’ 새누리당을 향해 위기가 기회이고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르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다. 항간에는 지금 새누리당의 참패를 즐기는 여론이 많지만 경제 및 외교안보적으로 중차대한 시기에 입법권력을 내준 정부여당이 힘을 잃고 국정이 표류하는 것을 우려하는 시선도 그만큼 많다. 또 진보정권 10년에 대한 피로감이 보수정권을 낳았듯, 20대 총선에서 보수정권 10년의 피로감을 대체할 진보정권의 싹이 움텄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한국 정치는 누가 실수를 덜하고 더하냐는 게임의 산물이다. 3당 정립(鼎立) 체제의 고난도 협치방정식을 요구한 민심은 이미 다음 정권을 담당할 세력을 찾고 있다. 이 경쟁에서 새누리당이 뒤처질 이유는 없다. 집권당 프리미엄과 보수토양 표밭에 창의적 리더십이 더해지면 옮겨간 치즈는 언제든 되찾을 수 있다. 그 리더십은 당청관계의 재정립에서 비롯되는 정치적 자율성과 정책적 정합성, 야당관계의 재설정에 필요한 유연한 협상력과 탄력적 연대, 그리고 당내 분열을 자초하는 계파 청산과 민심의 귀환을 호소하는 낮은 자세에서 잉태될 것이다. 이 리더십을 세우는 키가 박 대통령의 청와대에 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2017년 19대 대선에서 싫든 좋든 한 배를 타야 할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던져진 숙제는 이제 ‘누가 우리 치즈를 옮겼을까’가 아니다. ‘우리 치즈를 어떻게 다시 옮겨올 것인가’ 다. 정치적 상상력이 고갈된 여권에게 너무 어려운 숙제이지만.

기사제공=뉴스1(시애틀N 제휴사)




분류
Total 22,810 RSS
List
<<  <  562  563  56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