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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길의 영화읽기]공각기동대-인공지능과 버그, 그리고 니체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2004년작 <아이, 로봇>에서 인공지능 로봇공학자 래닝(제임스 크롬웰) 박사는 로봇진화론자다. 

그는 한 프레젠테이션에서 이런 말을 남기고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컴퓨터엔 언제나 유령이 존재해왔습니다. 일련의 코드가 무작위로 결합해 의외성을 만들죠. 예측할 수 없는 행동, 게릴라 같은 이 코드들이 로봇에게 혹시 ‘자유의지’와 ‘영혼’을 부여하는 건 아닐까요?”

래닝 박사가 말하는 컴퓨터에 존재하는 의외성은 전문용어로 ‘버그(Bug)’라고 한다. 

그것은 컴퓨터 프로그램이나 시스템의 착오를 의미한다. 인간으로 치면 일종의 실수 같은 것. 

‘컴퓨터’란 것 자체가 불완전한 인간을 대신하기 위해 탄생한 존재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완벽’이란 단어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이 하는 실수는 인간이라서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어떤 목적을 위해 완벽하게 프로그램이 짜여 진 컴퓨터의 실수는 결코 당연하지 않다. 

그래서 버그의 존재는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소름 돋는다. 컴퓨터가 인간이 하는 실수를 하다니. 

래닝 박사의 이론처럼 혹시 그들도 진화를 통해 인간처럼 자유의지나 영혼이 생겨나는 건 아닐까. 
    
 

반대로 컴퓨터에 주로 사용되는 ‘프로그램(Program)’이란 용어는 그 활용범위를 추상적으로 넓혔을 때 인간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지점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바로 ‘본능’이란 게 그렇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인간은 태어나면 엄마 젖을 빨고 배설을 하고 다시 배가 고프면 운다. 남녀 간에 서로 끌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모두 부모와 자연으로부터 프로그램화가 되어 태어난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같은 생각은 ‘알렉스 가랜드’ 감독의 2015년작 <엑스마키나>에서도 등장한다.

거기서 인공지능 분야 천재개발자인 네이든(오스카 아이삭)은 칼렙(돔놀 글리슨)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네 스타일의 여자가 흑인이라고 쳐. 그렇다면 왜 흑인 여자를 좋아할까? 자네가 모든 인종을 비교분석한 뒤 점수를 매겨 흑인을 고른 걸까? 그게 아니지. 그냥 흑인에게 끌리는 거야. 태어날 때 그렇게 프로그래밍화가 된 거지.”
    
 

<아이, 로봇>과 <엑스마키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작품에서 등장하는 인공지능(AI)은 창조주인 인간을 위협한다는 것. 

사실 인류를 위협하는 인공지능의 위험을 다룬 영화는 이전에도 많았다. 그 시작이 1968년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스페이스 오디세이>라면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터미네이터>시리즈는 엄청난 흥행으로 기폭제가 됐다. 

거기서 인공지능 컴퓨터 ‘스카이넷’은 인류를 말살하기 위해 핵전쟁을 일으킨다. 

그러했던 인공지능이라는 영화적 단골소재에 철학을 아주 두텁게 입힌 최초의 작품이 20년 전에 있었으니 그게 바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공각기동대>다. 

<아이, 로봇>과 <엑스마키나>도 <공각기동대>가 품고 있는 철학에 터전을 두고 있다. 

그 뿐인가. ‘워쇼스키’ 남매의 <매트릭스>와 ‘뤽 베송’ 감독의 <제5원소>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SF작품들이 대부분 이 영화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아무튼 <공각기동대> 이후 영화 소재로 인공지능의 포지션은 완전히 업그레이드가 된다. 

지난 수 십 세기 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이 신과 인간의 관계를 따지며 철학을 논했던 것처럼 지금 인공지능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관계를 조물주와 피조물이라는 보다 일반화된 개념으로 넓히며 꽤 오래된 철학 하나를 다시금 되새김질시키고 있다. 

바로 ‘니체’로 대표되는 실존주의 철학이 그것. 니체라는 천재 철학자가 뒤늦게 인정을 받았던 것처럼 실존주의 철학은 사실 이제야 힘을 받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며칠 전 바둑에서 인간이 처음으로 인공지능에게 패배한 요즘 같은 때는 더욱 그렇지 않겠나.  
    
 

‘키에르케고르’부터 ‘하이데거’, ‘사르트르’ 등 다양한 실존주의 철학자들 사이에서 ‘니체’가 특히 주목을 받는 이유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기존 종교적 세계관을 가장 철저하게 깨부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 실존주의는 종교와 가장 대칭점에 선 철학으로 인간은 신의 선택을 받은 존재가 아니라 “그냥 이곳에 내던져진 존재”일 뿐이라고 말한다. 

1,2차 세계대전은 집단지성의 원류인 ‘이성(理性)’에 대한 실망감을 인류 전체에 안겼고, 그래서 등장한 실존주의는 삶을 더 이상 신에게 맡길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 스스로 찾을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세상에 던진다. 

아울러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개별적인 가치를 인정할 줄 아는 아량도 인류에게 베푼다. 

결국 실존주의의 핵심은 인간은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 그 지점에서 오늘날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인공지능은 인간이 창조한 존재지만 가끔 인간을 뛰어넘을 수도 있도록 허락된다. 

<아이, 로봇>에서 인공지능이 진화를 하거나 <엑스마키나>에서 인간도 프로그래밍된 존재일 뿐이라는 논리가 가능해진다. 

아니. 인간의 진화가 당연하다 치면 인공지능의 진화도 가능하지 않을까. 

거대한 이 우주 공간 속에서 인간이나 인공지능이나 육질만 다를 뿐 어차피 비슷한 먼지 같은 존재. 

우주 전체는 빅뱅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려는 힘이 엄연히 존재하고, 그 속에서 인공지능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버그가 두려운 이유다.    
    
 

<공각기동대>에서 ‘프로그램2501’의 버그인 인형사(카유미 레마사)가 인간들에게 말한다. 

“당신들의 유전자도 자기 보존을 위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아. 현대과학은 아직 생명을 정의하지 못해. 난 정보의 바다에서 태어난 생명체지.” 

또 ‘리들리 스콧’ 감독의 2012년작 <프로메테우스>에서 안드로이드 로봇인 데이빗(마이클 패스밴더)이 “인간들은 왜 나 같은 안드로이드를 창조했죠?”라고 묻자 찰리(로건 마샬 그린)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냥 만들 수 있는 능력이 됐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의 간곡한 부름에도 불구하고 여태 대답을 하지 않는 걸 보면 인간을 만든 신도 어쩌면 비슷한 생각이 아닐까.   

지금이라도 소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한다면, 혹은 태평양 한 가운데서 시작된 거대한 해일이 전 대륙을 덮친다면, 또는 어떤 이유로 태양과 지구가 조금 더 가까워지거나 멀어진다면 인류는 지금 그토록 경멸하는 바퀴벌레와 함께 사이좋게 멸망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 별로 특별하지 않다. 

그래서 알파고와의 대전에서 이세돌 9단이 진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바둑을 두면서 알파고가 가끔씩 일으킨 버그를 더 두려워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인공지능의 공격으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해 타임머신을 타고 올 미래 전사를 기다려야 하나. 

2002년 4월12일 개봉. 러닝타임 83분.

기사제공=뉴스1(시애틀N 제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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