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시애틀지사 고문
퍼레이드와 풍장
이민 온 뒤
다양한 미국문화를 접하면서 쏠쏠한 재미를 느꼈다.
예를 들면 퍼레이드 같은 것이다. 매년 1월1일 아침 LA 인근 패사디나에서 펼쳐지는 로즈 퍼레이드를 TV중계로 보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형형색색의 생화로 만든 화려한 꽃차들이 꼬리를 잇는다.
정성스럽게 수놓아진 수십만 달러어치의 꽃들이 퍼레이드 종료와 함께 폐기된다.
뉴욕 메이시
백화점의 땡스기빙 퍼레이드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초대형 풍선 조형물들이 맨해튼 거리의 마천루 숲을 누빈다.
시애틀 다운타운 메이시 앞길에서도
추수감사절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LA와 뉴욕에선 매년 가을에 한국일보가 주최하는 코리언 퍼레이드가 펼쳐진다.
꽃차도 등장하는데 로즈 퍼레이드보다 훨씬 싸게 먹히는 플라스틱 꽃이다.
퍼레이드 비슷한
걸 나도 경험했다. 중고교 시절
전교생이 관제 반공데모에 동원돼 시가행진을 벌였었다. 미국 퍼레이드는 그런 억지춘향이 아니라 동네 축제다.
참가자들 중엔 유모차 탄 아기도, 휠체어 탄 노인도, 말 탄 카우보이도 있다.
색칠한 얼굴에 우스꽝스런 옷차림의 어릿광대들이 묘기를 벌인다.
가수들이 노래하고 무용수들이 군무를 펼친다.
퍼레이드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마칭밴드(취주악대)이다. 모자부터 구두까지 멋진 유니폼으로 통일한 수십~수백명이 각종 나팔과 북으로 웅장하게 행진곡을 연주하며 관객들의 귀를 즐겁게 해준다.
대개
밴드 앞에서 모조 소총을 든 의장대원들이 묘기를 펼치고 밴드 뒤에서 여학생 기수들이 커다란 깃발을 일사분란하게 흔들어대며 눈을 즐겁게 해준다.
시애틀의 최대
거리축제인 ‘토치라이트 퍼레이드’ 역시 마칭밴드 경연장이다.
올해도 해군 군악대, 시애틀 올스타밴드, 소방-경찰관 고적대, 워싱턴대학 총동창회 밴드 등 15개 팀이
나온다.
시애틀 수퍼소닉스 농구팀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게리 페이턴이 그랜드 마샬이다. “차이나타운의 용춤 팀이 올해도 출연한다”는 특별 선전문구가 눈길을 끌었다.
지난 수년간
토치라이트 퍼레이드에 시애틀한인회의 ‘어가행렬’팀이 참가했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무형문화재임을 관객들이 몰라서인지 호응도가 용춤에 족탈불급이었다. 어가행렬은 사실 민중축제와 거리가 멀다. 이조시대 때 종묘에 제사지내러 가는 임금님의 공식
행차였다. 지난 5월 서울에서 고증에 따라 정확하게 재현된 어가행렬은
정말 볼만했다.
꾀죄죄한 행사의상을
현장에서 주섬주섬 입고 엉거주춤 몰려가는 어가행렬은 솔직히 눈에도,
귀에도 별 재미가 없었다. 몇 년간 식상했던 그 침묵행진이 올해 환골탈태했다.
한국의 전통공연단인 신명 풍물예술단을 주축으로 하는 30여명 규모의 풍악대가 행렬
선두에 서서 신명나는 풍물놀이 한마당을 펼치고 태권도 시범 팀이 뒤를 이어 묘기를 보인다.
시골태생인 나는
풍물놀이에 진한 향수를 느낀다. ‘사물’ 타악기인 꽹과리‧장구‧북‧징에 관악기인 태평소 등이 어우러진 풍물놀이를 충청도 내 고향에선 ‘풍장’이라고 불렀다.
논두렁이나 장바닥에서 벌어지는 풍장을 아이들이 따라다니며
자연스럽게 퍼레이드를 이뤘다. 한 손으로 장구 양쪽을 번갈아 친 ‘양구 잽이’ 영덕이 할아버지가 꼬마들의
스타였었다.
풍장 팀이 앞으로
매년 토치라이트 퍼레이드에 참가하면 좋겠다. 풍장의 독특한 리듬은 미국의 어느 마칭밴드보다도 신명난다. 춤은 있지만 소리가 없는 중국 용춤이나,
소리는 있지만 기동성이 없고 구성이 단조로운 일본의 태고(太鼓) 인기를 단번에 능가할 터이다.
미국인들이 ‘코리아’ 하면 금방 ‘풍물놀이’를 연상하도록 풍장을 적극 육성해야 한다.
방법은 있다. 각 한국학교가 재외동포재단이 보내준 사물을 활용해
풍물놀이를 필수과목으로 가르치고, 각 노인회도 본국정부에서 사물을 지원받아 열심히 연습한다.
내년 ‘한국문화 주간’엔 풍물놀이 경연대회를 열고 입상팀들을 토치라이트에 퍼레이드에 출전시킨다. 풍물놀이를 앞세운 코리언 퍼레이드를 우리도 페더럴웨이나 린우드에서 펼쳐보자.
[이 게시물은 시애틀N님에 의해 2013-07-27 11:13:36 윤여춘 고문 "눈산 조망대"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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