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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5-13 20:40
이한칠/자리 잡기
 글쓴이 : 이한칠
조회 : 4,550  

이한칠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자리 잡기

지난 가을, 나는 매실나무 두 그루를 정원에 심었다. 키는 작지만 양팔을 벌린 씩씩한 모습의 6년생 묘목이었다. 농장 주인이 일러주는 대로 묘목을 심으면 봄에 꽃을 피운 뒤, 후년에는적잖이 열매를 맺을 것이라 했다. 초록의 탱글탱글한 매실 열매를 상상해 보니 입에 성급한 군침까지 돌았다.

다음날 아침, 묘목의 행색을 살피기 위해 정원으로 나갔던 나는 하마터면소리를 지를 뻔했다. 자리 잡기를 잘 하리라는 내 기대와는 달리 모든 잎사귀들이 비실비실 축 늘어진채 풀이 죽어 있었다. 시골 초등학교에서 대도시로 전학 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아이 모습이 이보다 더처량할까.

어제 묘목을 심을 때까지만 해도 앙증맞은 잎사귀들은 손을 쪽 뻗어 제 모양을 한껏 뽐내지않았던가. 순간 물과 공기마저 바뀐 새로운 곳으로 홀로 전학 온 아이가 첫날부터 의연하기를 기대했던내 욕심이 민망했다.

곧 마음을 느긋이 먹고 일주일을 기다렸지만 어느 잎사귀도 나를 안심시키는 눈길을주지 않았다. 점점 더 몸을 돌돌 말아 사리더니 급기야 나뭇가지와 절교하듯 모두 떠나가 버렸다. 낯선 곳에 자리 잡는 어려움이 어찌 묘목에만 해당될까. 우리들의삶, 특히 고국을 떠나 문화는 물론 언어마저 다른 나라에서 자리 잡기란 만만치 않은 일임에 틀림없다.

아내는 고등학교 9, 10학년 두 아이를 데리고 나보다 1년 반 먼저 시애틀에 둥지를 틀었다.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민감한나이에 이중문화를 소화시키는 것이 쉽진 않았으리라. 그러나 아내는 아이들의 든든한 멘토 역할을 했고, 아이들도 인내심을 갖고 자신들이 원하는 길을 스스로 잘 닦아 자리를 잡아 갔다.

나는 이민을 결정한 뒤, 멀쩡한 직장에 사표를 냈다. 마흔 여덟 살이었다. 형제들과 친구들은 나의 결정을 적이 우려했다. 늦은 나이에 자리 잡기가 힘들 것이라는 염려였다. 사람 사는 세상에크게 다를 것이 있으랴. 나는 욕심 낸 높은 목표보다 분수에 맞는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 미국에 온 지 여섯 달 만에 내실이 탄탄한 회사에 취직하여 이런저런 다른 문화까지 온몸으로 느끼면서 13년 째 근무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의 인생은 자리 잡기의 연속인 것 같다. 초등학교 입학을시작으로 사회에 발을 디딜 때까지. 아니, 그 후에도 모두가자리를 잡아가는 과정들이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이니 세계 곳곳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알 수 있지만, 옛날 영화를 보면 부모와 자식, 그리고 친구들과 막연히 작별할 때“자리 잡히면 연락하라”는 대화가 흔히 나온다. 그만큼 자리 잡기가 중요했기 때문이리라.

이민을 오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자리 잡기가 쉽지 않다. 그러기에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갓 이민 와 자리가 잡히지 않은 이들 곁에는 사람들이 함께 하길 주저한다는일화도 있다. 이렇듯, 누구나 자리를 잘 잡아야 주변 사람들도편안해 한다.

아내는 이민 온 학생과 부모들에게 먼저 맛본 소중한 경험을 적극적으로 나누고 있다. 나 역시 젊은이들에게 다시 공부해 볼 것과 주류 사회의 직장을 두드릴 것 등의 경험을 나눈다. 그들이 빠른 시간 내에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름대로 자리잡은 사람이 많은 이민사회일수록 밝고 활기가 넘칠 것이다.

뱀띠해인 2013년 새해에도 서로서로의 경험과 사랑을 나누는 희망찬한인 사회가 되길 소망한다.

매실나무 전문가인 지인이 내게 말하기를, 늦가을에 묘목의 잎이 다 떨어지고나면 겨우내 뿌리를 내려 새봄에 꽃을 피울 테니 기다려 보란다. 그렇지, 자리 잡기가 그리 쉬운가. 이렇게 경험을 나누며 시간을 갖고 기다려주면 옹골차게 뿌리를 내려 제 자리를 잡아 가겠지.
새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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