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경(UW 한국학도서관 사서)
미국 작가와 영국 중고서점 직원이 20년 주고받은 편지이야기
책 주문을 하고 책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특히나 바다를 건너 멀리서부터 오는 책인 경우에는 그 기다림으로 하루가 더디게 가는 것은 물론 하루에도 몇 번 문밖을 서성이게 한다는 것을.
인터넷으로 24시간 안에 배송이 완료되고 전자책으로 언제든지 인터넷 결제를 끝내고 나면 책 페이지가 술술 열리는 세상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일지도 모르겠다.
1949년 뉴욕의 어느 무명 작가가 런던의 채링크로스 84번지(84 Charing cross road)에 있는 마크스 (Marks & Co.)중고서점으로 책을 주문한다. 뉴욕에서 찾기 어려운 영국 작가들의 책을 주로 주문하는 이 작가는 책이 도착하기를 고대하며 마크스 서점 직원과 편지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책을 주문한 뒤 발송을 알리고 대금을 치르는 단순히 사무적일 수 있는 편지가 서서히 이 두 사람 간에 우정과 교감이 쌓이게 되는 도구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편지는 마크스 서점 직원이 세상을 떠나고 중고서점이 문을 닫게 될 때까지 근 20년간 지속됐다.
편지 엮어 유명 작가로 발돋움/연극과 영화로도 만들어져
실화인 이 책은 평생 글을 써왔지만, 무명작가였던 헬렌 한프씨와 마크스 서점의 프랭크 도엘씨와의 주고 받은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헬렌 한프씨는 프랭크 도엘씨와 오갔던 묵직한 편지 묶음을 급기야는 출판하게 되는데 비로소 그녀는 이 편지 글로 인해 유명 작가가 된다.
책은 출간된 이후에 연극과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국의 인기 배우 앤서니 홉킨스가 마크스 서점의 직원을 맡은, 1987년에 만들어졌다는 그 영화가 어떨지 매우 궁금하다.
이 책은 무척 짧은 편지글로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히지 않았다. 번역의 부자연스러움은 둘째 치고서라도 책을 읽는 진도가 쑥쑥 나가지 못한 데에는 헬렌 한프 씨가 주문한 책들이 내게는 모두 낯선 제목들이어서 그랬다.
책을 읽다가 모르는 단어가 나와서 막히는 느낌처럼 생소한 책 제목과 저자의 이름이 등장할 때마다 낭패감에 한숨을 고르느라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중고서점을 찾는 작가가 찾는 책이 아무 서점가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을 거라고 마음속에 스스로 위안으로 삼아 보지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작가의 책을 부지기수로 만나는 것은 책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내게는 매우 힘든 일이다.
"부러운 마음을 갖게 해주는 동시에 스트레스를 주기도 하는 책"
그뿐만 아니다. 헬렌 한프 씨는 ‘옷을 입어보지 않고 사지 않듯이, 읽어 보지 않은 책은 사지 않는 원칙’의 소유자로 주문할 때 이미 책의 내용을 익히 잘 알고 있다. 독서광인 작가가 갖는 책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그녀가 이미 섭렵한 책의 세계는 읽는 독자로 하여금 한껏 부러운 마음을 갖게 해 주는 동시에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누군가 내가 모르는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머릿속은 백지가 되고 얼굴이 하얗게 질리게 된다. 마치 발가벗고 서있는 듯한 느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을 읽었다. 이 책이 베스트 셀러의 작품이 되었다고 하는데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서 무슨 얼굴빛을 띠었을까 궁금하다.
"책에 감동하고 같이 열광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다행히도 마크스 서점의 프랭크 도엘씨는 작가로부터 책 주문을 받으면서 누구처럼 얼굴이 하얗게 질리지는 않는다. 헬렌 핸프씨가 주문하는 책을 정성스럽게 찾아주고 책에 대해 자신의 진지한 소견과 대화를 나누며 서로가 알고 있는 책의 세계를 교감하는 소중한 친구가 되어 준다.
헬렌 한프씨가 20년이 되도록 가까운 근교 서점에 가서 책을 사지 않고 먼 런던에까지 편지를 쓰며 책을 구해 읽었는지 그 숨은 뜻을 이해할 것 같다. 책에 감동하고 같이 열광하며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맘에 드는 책을 고르는 일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누는 관심사는 책을 넘어서 점차 그들의 삶으로 번지게 되고 한 번도 실제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가족과 같이 서로의 삶을 살피고 사랑해주는 사이가 되어 간다. 헬렌 한프씨는 프랭크 도엘씨 외에도 마크스 서점의 모든 직원과 친구가 되는데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이 되면 달걀과 설탕 같은 필수 식료품을 영국의 친구들에게 보내주어 그들을 감동하게 한다.
1950년대 초 영국은 2차 세계 대전 후 식량난으로 인해 식료품을 배급 받았던 시절이었다. 일주일에 달걀 하나를 겨우 구경할 수 있었던 시절 헬렌 한프 씨로부터 온 정성스런 선물은 마크스 서점의 직원들을 언제나 행복하게 하는 즐거운 기다림이었다. 책으로 나누는 정신의 즐거움만큼이나 달콤하고 맛있는 음식들이 편지를 읽는 독자의 마음마저 풍성하게 채워준다.
두 사람은 끝내 실제 만나지 못하고 끝을 맞아
안타깝게도 이 두 사람의 우정은 끝내 만남을 이루지 못하고 끝을 맞이한다. 좋아하는 영국작가의 글을 탐독하며 영국을 늘 마음속에 품고 그곳에 그토록 가보고 싶어했을 헬렌 한프씨가 20년 동안 영국 방문의 기회를 이루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그녀에겐 아직도 주문할 책이 많이 남았을 것이고 이 모든 책을 구해서 읽고 나누기 전까지는 대서양 바다를 차마 건널 수 없었던 것 아니었을까?
헬렌 한프씨는 프랭크 도엘씨가 세상을 떠난 뒤 그들의 우정을 회상하며 ‘이 모든 책을 그녀에게 팔고 떠난’ 프랭크 도엘씨를 ‘축복 받은 사람’이라고 추억했다.
책 속의 양식을 내 마음과 영혼으로 삼으면 '축복 받은 사람'
‘축복 받은 사람’의 정의를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내려 본다. 책을 좋아해서 책 속의 양식을 내 마음과 영혼의 것으로 삼는 사람은 정말 ‘축복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축복 받은 사람들간의 우정이 채링크로스 84번지의 공간을 넘어서 이곳 시애틀에도 넘쳐나기를 기대하며 오늘도 주문한 책이 도착하기 만을 간절히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