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열면 안겨오는 아침 풍경 속에침실 창 가까이에 뿌리를 깊이 내린 아름드리나무가 있다. 여름내 풍성한 잎으로 너른 그늘을 만들어 주는나무라 손자들이 오면 그 아래 돗자리를 깔고 아이들과 간식을 먹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우리에게 고마운 나무다.
매일 아침마다 그 나무와 눈을 맞추며 하루는 시작된다. 녹색의 나뭇잎이 가지가 휠 정도로 무성한 그것은 우리 집과 마주한 이웃집 사이에 심어져 있어 커튼을 닫지 않아도 욕실 창의 덧문 역할을 톡톡히 해주어서 우리의 사생활이 보호(?)받는다.
무엇보다 아침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이웃집의 건물이거나 얼기설기 엉켜있는 전깃줄 같은 복잡한 것이 아닌 녹색의 푸른 자연이라는 것에 늘 안도하고 행복해한다. 아침마다 눈을 맞추며 인사를 건네던 교제가 아침이 더디 오고 저녁이 일찍 찾아오는 겨울철에 가서는 끊어져 버리고 만다. 기상하는 시간에 밖은 늘 칠흑이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떨어져 쌓여 있는 낙엽을 치우려고 마당으로 나간 내 앞에, 손수 만든 낙엽이불을 발등에 소복이 덮고는 벌거숭이가 되어 하늘을 향해 별 말없이 서 있는 낯선 그것과 재회했다. 앙상한 가지를 항복하듯 뻗친 가지 사이에 잔가지랑 짚을 물어다 지은 초가 같은 새 둥지가 덩그렇게 얹혀 있는 것이 내 시야 하나 가득 들어왔다.
늘 푸른 잎을 풍성하게 달고는 마음이 넉넉한 동무처럼 나를 반겨주던 그 얼굴이 아니다. 윤기 없는 바짝 마른 모습으로 나를 멀뚱히 바라보는 것 같은 모습이 그 동안 뜸했던 우리 사이가 다 네 탓이라며 항의하듯 곱지 않은 시선이다.
“철이 철인만큼 해가 늦게 뜨고 빨리 지기 때문이지 내 탓은 아니야”라고 궁색한 변명을 해보지만, 그것은 끄떡도 않는 듯하다.
여름 내내 무성한 잎을 가지가 휠 정도로 달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 새들이 둥지를 치고 살고 있었던 것을 오늘 아침까지도 모르고 있었다. 이 나무는 나에게만 넉넉한 마음을 베풀어 준 것이 아니라 새에게도 친구가 되어주고 그것들이 나무그늘 아래 둥지를 치도록 허락해 주었다. 날마다 눈을 맞추며 좋아하던 그것을 나는 완전하게 알지 못했다. 잘 알고 좋아하고 있다는 것은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커튼을 여닫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기에, 녹색의 자연을 제공해 주는 편리함을 사랑했을 뿐이라고 생뚱맞은 표정으로 따지고 들까 봐 지레 겁을 먹으며 “겨울이야! 해가 늦게 뜨고, 일찍 지는 12월!”
그렇다. 어느새 한 해의 마지막 달에 이르렀다. 지나온 날들이 새삼스레 되돌아 보이는 언덕에 올라선 셈이다. “나는 세상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지금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나?”라고 나 자신에게 스스로 물었을 때 갑자기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하루가 또 지나가고 있다. 오늘 하루, 무슨 일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시간은 어김이 없다. 기다려 주거나 더디 가는 법 없이 묵묵히 제 할 일을 다 한다. 세월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란 말을 실감할 수 있는 내 나이, 사랑과 용서와 기도의 일을 조금씩 미루는 동안 세월은 저만치 비켜 가고 있었으며, 사랑하는 이들도 한둘 떠나는 시린 세월을 살고 있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며 그리고 한 번뿐이라 반복할 수도 없는데도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있지 않았다. 두 눈은 멀쩡히 뜨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제대로 본 적이 없었던 것에 대하여 새 둥지를 바라보며 고해하듯 깊이 반성했다.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지기까지 내 시선에 담겼던 것 중에 내가 보지 못하는 세상이 내 좁은 시야를 넘어 존재하고 있음을 눈에 보이는 것만이 모든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준 한 그루의 나무가 오늘의 스승이다.
새해엔 하루하루 처음 열리는 새로운 날들을 감격으로 맞이하고 싶다. 모든 일을 감사함으로 감당하는 한 해가 되기를 꿈꾼다. 허둥지둥 뛰어가던 걸음을 늦추어 생각의 폭을 넓히어 느릿느릿 걸으면서 주위를 살펴 나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은 없는지, 사람의 정이 그리워 절망하는 이웃은 없는지. 내 가슴에 그 마음들을 기대게 하고 싶다. 기대인 슬픈 마음의 올을 한 번에 한 영혼씩 어루만지며 끝없는 위로와 사랑의 길을 열어 줄 수 있기를 바라는 소박한 소망을 품는다.
그리고 나는 주변에 일어나고 있는 것에 관심을 두고 눈길을 주며 살고 싶다. 가끔 고개 들어 하늘, 별, 달도 쳐다보고, 풀냄새도 맡으면서도 느리지만 흐트러지지 않고 우아하게 새 길을 걸어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 가슴에서 쿵쿵 북소리가 난다. 그리고 확실하게 행복한 사람이 되는 단 하나의 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부터라도 끊임없이 사랑만 하며 살아서 행복해 지고 싶다. 나무를 사랑하는 그런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조건이 없는 사랑을 나누고 싶다.
새해엔 잎 너른 나무와 더욱 더 은밀하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이다. 새해가 밝아오고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 그는 내가 사랑하는 친숙한 모습으로 나를 반갑게 맞아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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