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고문)
손에 손잡고
아니! 아젤리아 뒤켠에 그림자처럼 자리하고 있는 나무, 호랑가시나무다. 벌써부터 녀석의 존재가 내 눈에 띄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지난봄에도, 지지난 봄에도 녀석은 쭈뼛거리며 얼굴을 내밀었지만 늘 내 살생부의 제일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당의 가장 끝 간 데, 울타리의 가장 끝 모퉁이, 과연
그곳은 아젤리아만도 자라기 척박한 땅이었다. 나는 해마다 녀석의 얼굴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싹둑, 무 자르듯 너무나 몰인정하게 목을 쳤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올 봄엔 그만 마음이 동하고 말았다. 애초에 가위를 갖다 대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순간, 녀석의 물기 어린 눈망울에
재여 있는 끈질긴 생명력에 뭉클한 감동과 연민 같은 것을 느낀 것이었다.
“그래, 올 봄엔 얼마나 잘 자라는지 한번 보자.”
그런데 오늘, 녀석의 키가 설핏 아젤리아를 넘고 있다는데 눈길이 멈췄다. 아젤리아가 그곳에 자리한 지는 십년이 지났다. 그런 나무의 키를
단숨에 훌쩍 넘기다니. 공연한 후회가 일었다.
그렇지만 녀석을
제거하기엔 너무 늦었다. 엄지손가락보다 더 굵은 뿌리가 서넛이나 얽혀 있는 때문이었다. 키를 키우지 못했으니 뿌리가 깊어질 수밖에.
그런데 희한했다. 주인의 불편한 심사를 눈치 챈 까닭일까, 호랑가시나무는
곧은 자세로 아젤리아를 밀착 경호하듯 서 있었다. 가끔 영화에서 보면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정성껏
에스코트하는 모습처럼 말이다.
앞서 걷는 여인의 허리를 감싸 안은 듯하지만 피부접촉은 없는 우아한 행동, 정말이지 뜻밖의 그림이었다. 별스런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척박한 땅 운운하며 가지가 생겨나기 무섭게 잘라냈던 게 실은 순전히 내 오만이었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저들끼리 저렇게 어울려 사는 것을.
얼마 전에 부챠드가든에 다녀왔다. 잘 정돈된 화원이었다. 키
작은 꽃들은 특유의 앙증맞은 모습으로, 색채가 화려한 꽃들은 그 농염함에 머리가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때맞춰 장미가 만개하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색상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꽃송이들이 나름 여왕의 자태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봉오리에서부터 만개한 꽃에 이르기까지
피어나는 순간순간을 한 자리에서 다 보여주었다. 과연 그것들을 잘 엮어보면 느린 화면으로 꽃이 피어나는
낱낱의 과정을 다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초엔 그곳 일대가 석회암 채석장이었다고 한다. 듣는 것만으로도 푸석푸석 흙먼지가 이는 황폐한
땅에 길을 내고 나무와 꽃을 심어서 화단을 가꾸고 호수를 만들고 야산과 어울리기를 백여 년. 어찌 설익은
인공미가 없을까마는 척박한 땅에서 뿌리를 내린 그 절대 절명한 꽃과 나무의 생존력을 생각하면 초입에서 느꼈던 설렘과 생명의 기운이 소홀한 것이
아님을 느끼게 했다.
깨끗하면서도 말끔한 화단들이 마치 군더더기를 걷어낸, 잘 정돈된 글의 단락을 보는 듯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저만치 눈 아래 호수가 보였다. 잠시 쉴 겸
벤치에 앉으니 나도 한 그루의 나무가 된듯 싶었다.
호수를 에워싼 나무들과 물에 드리워진 그림자, 시원한 물줄기를 뿜어 올리는 분수와 군데군데 떠 있는 부초들, 때마침
호수 건너편 나뭇가지에 앉은 새 한 마리까지 어우러진 자연의 절묘한 조화. 그러나 낭떠러지 비탈에서
한줌의 흙에 기대 자세를 흩트리지 않은 채 꼿꼿이 키를 키운 한 그루의 나무는 이 모든 세계가 삶의 고통과 열정이 만들어낸 결과라는 걸 말하는
듯했다.
비로소 나는 보았다. 화원은 하나 하나의 은밀한
아름다움보다 전체가 보여주는 조화로움을 더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그리고 바로 그때, 내 귀에는 함성처럼 울려 퍼지는 노래가 있었다. 손에 손잡고.
부차드가든의
아름다움은 ‘손에 손잡고’ 이었다. 그곳엔 귀한 꽃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 집에서도 키우고 이웃의 정원에서도 쉽게 눈에 띄는 그저 그런 꽃들도
꽤 있었다.
사실 그곳이 꽃으로만 이루어진 화원이었다면 그 또한 단조로웠을지 모른다. 야생의 나무가 주는 자연미와 인공적인 조림으로 이루어진 함께
하는 아름다움이 특별한 향연을 만드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손을 잡는다’는 것은 서로의 온기를 전하는 일이다. 옆의
꽃이 전해주는 체온에 내 체온을 녹여 또 다시 옆의 꽃에 전하는, 그래서 그건 암묵적으로 생각과 행동을
함께 하는 일이다.
그건 때로 물결을 이룬다. 바람의 힘을
빌려 해일을 일으키는 것도, 발트 3국의 자유와 독립을 얻어낸 200만 명의 인간 띠도, 88올림픽이 한국의 역사를 바꿔 쓰게 한
것도 ‘손에 손잡고’ 의 이력이다. 아젤리아와 호랑가시나무가 그려낸 아름다운 그림도 나만 몰랐지, 이미 ‘손에 손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