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숙 시인(워싱턴주
기독문인협회 회원)
절망은 없다
오래 전 지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 지인의 친구였던 한 여인은 사랑하는 남편을 사고로
잃고, 자기도 죽겠노라고 약까지 먹으며 살아갈 의미가 없다고 비관하며 죽지 못해 살고 있다고 말했는데, 결국 남편이 하늘나라로 간 지 7개월도 되기 않아 남자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 남자와 사랑에 빠져 주위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결혼한 뒤 그것도 원 시집식구들이
살고 있는 같은 아파트에서 보란 듯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시장까지 팔짱을 끼고 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전혀 의식하지 않아 지인이 충고까지 해줬지만 “그 사람들이 내 인생 살아주는 것도 아니고 지금이 너무 행복해서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남편과 사별한 뒤 쉽게 사랑에 빠진 그 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어려움에 빠져 당장
죽을 것 같이 힘들고 괴롭지만 인간에게는 ‘내일’이라는 축복의
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슬픔과 괴로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기쁨과 즐거움의 기회가
찾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사 오늘 울어야 해도 내일은 웃을 수 있으며 오늘 슬퍼도 내일은 기쁨이 찾아오는 것이 삶이고 인생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죽으라는 법은 없다’는 말도
있고 ‘신께서는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되 견딜 수 있을 만큼만 주신다’는
격언이 있지 않는가.
더욱이 엄밀하게 나의 삶을 생각해볼 때 내 생명도 온전하게 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날마다 느낀다. 종교적으로
보면 신이 나의 삶을 지배하기도, 환경이 나의 삶에 큰 관여를 하기도 한다.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한 삶을 자기 마음과 의지대로 조정할 수 있다고 상상해보자. 그 인간의 욕망으로 인해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생길지는 상상할 수도 없으며 결국 세상은 파멸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평정하게, 절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세상에는 70억명이 넘는 인간이 살고 있지만, 얼굴이
완전 똑같은 사람은 없다. 설사 쌍둥이라 해도 다른 점이 있기 마련이다. 모든 인간이 다 다르다는 경이로운 사실은 겉모양뿐 아니라 사는 모습에서도 모두 다르다. 똑같이 기쁘고 똑같이 슬플 수도 없는 것이다. 비 오는 날이 있으면
해 맑은 날도 있고 비 온 뒤에는 아름다운 무지개도 떠오른다.
영원히 무지개만 있진 않고 다시 해가 떴다 비가 와야만 무지개가 떠오르듯 슬픔도 있고, 기쁨도
있고, 때로는 권태도 있고 환희도 있어야, 인생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이 또한 신이 내리신 축복일 것이다. 그 축복은
연단의 과정을 통해 이뤄짐도 느끼게 된다.
해산의 고통을 경험한 어머니야말로 생명의 고귀함을 깨달아 진정한 사랑으로 어떤 희생도 감수하게 된다.
우리 삶이 힘들고 지쳐 탈진되더라도 ‘영원한 절망과 좌절’이
없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스스로 이겨내는 연단의 과정을 거칠 때 반드시 ‘또 다른 희망과 용기’가 다가옴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생의 겨울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꽃피는 봄도 찾아오고 시애틀의 여름처럼 화창한 펼쳐지는 날도
온다.
결국 삶은 불행도 행복도 반반일 수 밖에 없다. 오늘의
웃음은 내일의 슬픔을 덜어주기 위해, 내일의 고통은 모레의 기쁨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하루
하루를 연습하고 준비하는 삶이 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