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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 젖은 낙엽'

시애틀N 조회 : 6,362
‘황혼’이라는 말을 들으면 서쪽 하늘을 아름답게 물들이는 저녁노을을 머리에 떠올려야 정상이다.

아니면 워싱턴주 해안 산골마을 포크스에서 촬영해 크게 히트한 흡혈귀 연작영화 ‘트와일라이트’(황혼)의 로맨틱한 장면을 연상하는 젊은이들도 있을 수 있다. 그것도 정상이다. 하지만 나는 황혼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뜸 ‘황혼이혼’이 생각난다. 비정상이다.

‘무자식 상팔자’라는 한국 TV 드라마에서 황혼이혼 직전까지 치달았던 이순재-서우림 노부부가 얼마 전 간신히 화해했다. 이순재가 서우림에게 재산을 분할해주는 조건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2005년 ‘숙년(熟年)이혼’이라는 드라마가 히트했다. 거기서도 마초 타입의 할아버지가 평생 고분고분 순종해온 할머니에게 이혼을 요구당하고 재산을 분할해줬다.

반평생을 함께 살아온 뒤 환갑ㆍ칠순이 지나자 갈라서는 노부부의 황혼이혼은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지구촌 전체에 번지는 사회현상이다.

‘이혼 천국’ 미국에선 지난 2004년 1,000명당 14명이었던 이혼율이 2011년엔 10.8명으로 줄었는데도 60세 이상의 ‘실버 이혼’은 58%나 늘어났다. 영국도 실버 이혼율이 지난 10년 새 두 배 가량 늘어난 것으로 들었다.

요즘 한국에선 4쌍이 이혼하면 그 중 1쌍은 황혼이혼이다. 지난 2011년 한국의 전체 이혼 중 20년 이상 동고동락한 노인부부의 이혼이 24.8%를 차지했다. 1990년까지만 해도 그 비율은 5.2%에 불과했다. 황혼이혼이 20년 새 5배나 늘어났다는 얘기다. 반면에 1990년 거의 40%나 됐던 신혼부부(결혼생활 4년 이하)의 이혼비율은 26.9%로 대폭 줄었다.

여성의 경제활동이 늘어나고 남녀평등 이념이 보편화되면서 결혼과 이혼의 가치관이 달라졌다. ‘여필종부’니 ‘부창부수’ 따위의 말은 이젠 듣기 어렵다. 최근 기대수명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제 55~64세의 공식호칭은 ‘고령자’ 아닌 ‘장년’이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살지 않고 파뿌리를 염색한 후 ‘돌싱’(돌아온 싱글)으로 젊게 사는 세태다.

부인의 재산 분할권이 점차 뿌리를 내리는 것도 황혼이혼 증가에 한 몫 한다. 이혼소송에서 아내가 수십 년간 가사를 전담한 전업주부의 기여도를 근거로 재산분할을 요구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이혼한 아내는 남편의 노령연금을 혼인기간만큼 잘라 분할연금으로 받을 수 있다. 남편의 국민연금이나 공무원 연금도 재산분할 대상이라는 판결도 있었다.

그래서 황혼이혼의 원고는 대개 아내 쪽이다. 이혼 후 생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남편의 횡포를 참고 견디다가 자녀들이 모두 출가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이혼장을 내민다. 일본에선 ‘나리타 공항의 이별’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정년퇴직 기념여행에서 귀국한 후, 아니면 신혼여행 떠나는 막내를 환송한 후 공항에서부터 각각 자기 길을 간다는 얘기다.

한국 남자들은 정년퇴직 후 대체로 ‘백수 방콕 노인’이 된다. 아내들은 그런 남편을 ‘공포의 거실남,’ ‘파자마 맨,’ ‘종간나’(종일 간식타령하는 남자) 따위로 비하해 부른다. 일본 여성들은 그런 백수남편을 ‘비에 젖은 낙엽’이라고 부른단다. 꽤 시적이다. 땅에 떨어져 비에 젖은 후 신발바닥에 달라붙어서 짓밟혀도 한사코 떨어지지 않는 낙엽에 빗댄 말이다.

늙은 남편 돌보기가 부담스럽다는 여성이 72%나 된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남편과 사별한 할머니에게 재혼을 권유하면 대부분 “미쳤냐? 왜 그 고생을 또 사서 하느냐”며 펄쩍 뛴다. 60대 남편은 아내 손만 만져도 이혼당하고, 70대 남편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이혼사유라는 우스개도 있다. 가부장적 권위로 아내를 휘잡아온 남편들의 자업자득일 터이다.

가까운 친지가 황혼이혼을 했다는 말을 엊그제 전해 듣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나의 시애틀 정착을 도와줬고 산에도 오랫동안 함께 다닌 분이다. 부부 모두 신앙심 깊은 중견 교인이다.

학력으로나 경력으로나 존경받는 그 친지가 70대 중반에 황혼이혼을 한 것은 한국만 아니라 한인사회에도 이미 실버이혼이 만연하고 있다는 반증 같아 씁쓸하다.                                                                                /윤여춘 한국일보 시애틀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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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고문 "눈산 조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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