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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산조망대/ 눈은 누가 치우나?

시애틀N 조회 : 3,628

윤여춘 한국일보 시애틀지사 고문

눈은 누가 치우나?
 
첨단도시 시애틀에 살면서 후진국이었던 반세기전 한국의 새마을운동을 떠올릴 때가 있다. , 가을 두 차례 비영리단체인 워싱턴주 트레일협회의 등산로 보수공사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할 때다. 삽과 곡괭이를 든 한인 산악회원 40여명이 악천후와 등산객들의 구둣발에 치여 망가진 등산로를 5시간 동안 손질한다. 아예 없는 트레일을 새로 만들 때도 있다.

공사 날 비를 맞기 십상이다. 시애틀은 봄가을 날씨가 대개 그렇다. 흙투성이 작업복에 얼굴이 땀과 빗물로 범벅이 된 회원들 모습이 옛날 한국에서 신작로를 닦거나 개천에 다리를 놓으며 구슬땀을 흘린 새마을운동 대원들 모습을 영락없이 닮았다. 누군가가 흥얼거린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살기 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박정희 대통령이 1960년대 말 시작한 새마을운동의 요체는 근면자조협동이다. 결과적으로 농촌근대화에 기여했고 국민의 공동체 의식과 자발적 참여의식을 고취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세계 74개국에 수출됐다. ‘잘살기 운동’을 배우겠다며 후진국 지도자들이 몰려왔다. 하지만 정작 본고장 한국에선 새마을운동이 설 땅을 잃었다. 잘살게 됐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그 새마을운동을 다시 한번 떠올린 계기가 있었다. 등산로 보수공사가 아니다. 시애틀이 미증유의 폭설에 파묻혔던 지난 주말 상황이다. 새벽에 출근하려고 나가 보니 밤새 눈이 엄청 쌓였다. 내 소형차로는 도저히 뚫고 갈 수 없었다. 정강이까지 빠지는 눈길을 1마일 이상 걸어서 큰 길까지 나와 다른 동네에서 오는 동료 차에 편승해 출근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분지 형이다. 축구장을 수십개 들여놓을 만큼 엄청난 단지에 아파트 27개 동이 띄엄띄엄 세워져 있다. 드넓은 주차장을 어렵사리 빠져나간다 해도 가파른 진입로를 오르는 건 언감생심이다. 그날 우리 아파트 주민들은 하루 종일 미동도 없었다. 출근도, 외출도 하지 않은 모양이다. 대형 자동차들도 눈을 뒤집어 쓴 채 얼어붙어 있었다.

예전에 한국에 살 때 큰 눈이 내리면 이웃주민들이 나와서 정담을 나누며 함께 치웠다. 녹은 눈이 밤새 얼어붙으면 아이들과 노인들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연탄재를 뿌렸다. 하지만 그날 우리 아파트 주민들 중 밖에 나와 눈을 치우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관리사무실 직원들도 솔선수범은커녕 비탈길 진입로가 미끄럽다며 아예 출근조차 하지 않았다.

눈난리가 일단 끝나자 제설책임의 소재를 놓고 공방이 일고 있다. 대다수 도시들이 관련 조례를 두고 있다. 시애틀시는 관내 총 2,300여 마일의 인도 중 일부에만 제설책임을 지며 나머지 대부분은 도로변 건물주, 관리인 또는 거주자가 지도록 했다. 위반자에게는 250달러 벌금을 부과하도록 돼 있지만 실제 벌금 티켓을 받은 사람은 지금껏 한명도 없다.

새마을정신의 원조인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제설작업을 아파트 관리인이나 미화원이 할 일로 치부하는 사람이 많다. 서울시가 2006년 ‘내 집 앞 눈 쓸기’ 조례를 정했지만 성과는 미미하다. 아파트 주민들의 책임구역이 불분명하고 제설도구를 갖춘 가구도 거의 없다. 위반자에게 100만원 과태료를 물리겠다고 흰소리 했던 당국이 반대여론에 혼쭐났다.

한국인의 근면자조협동 정신은 조상전래의 유산이다. 품앗이나 모내기의 두레가 그렇다. 정부주도의 후진국 형 새마을운동이 오히려 자생적 협동정신을 훼방했다는 지적도 있다. 그래서 요즘은 문화시민의식의 선진화를 표방하는 민간주도의 제2 새마을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한다는 뜻의 순수 우리말인 ‘울력’ 운동도 번지고 있단다.

미국인들의 이민조상인 청교도들도 울력을 실천했었다. 신천지에 도착한 후 공회당과 학교부터 함께 지었다. 내 생각에도 내 집 앞 눈 쓸기는 벌금위협으로 강요할 사안이 아니지만 마음이 찜찜하다. 또 폭설이 쏟아질 경우 아파트 주민들은 역시 미동도 않을 것이고, 나는 또 새벽 눈길을 정강이까지 빠지며 걸어 나가 동료 차에 편승해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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