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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산조망대/ ‘피치 못할 마지막 이사

시애틀N 조회 : 4,601

윤여춘/한국일보 시애틀지사 전 고문
 
피치 못할 마지막 이사 
 
유대민족의 조상인 야곱은 악랄한 사람이었다.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쌍둥이 형의 장자권을 가로채고는 목숨을 부지하려고 타국땅 외삼촌 집으로 줄행랑쳤다. 70대 후반의 노구에 지팡이 하나만 들고 혈혈단신 떠났던 그가 20년 후 돌아올 때는 4명의 처첩과 11명의 아들(막내는 귀향 도중 출생)을 비롯해 많은 하인들과 엄청난 규모의 가축 떼를 거느린 거부가 돼 있었다.

최근 나도 시애틀에서의 긴 객지생활을 정리하고 야곱처럼 꼭 20년만에 고향 땅 LA로 귀환했다. 야곱이 고향을 떠난 나이와 내가 고향에 돌아온 나이가 비슷하다. 야곱처럼 거부는 못 됐지만 나도 그간 살림살이가 꽤 늘었다. 가방(핸드 캐리) 하나만 들고 시애틀에 올라가 줄곧 원베드룸 아파트에서 살았는데 무슨 살림살이가 그렇게 많은 지 이삿짐 박스가 129개나 됐다.

야곱은 외삼촌 집(현재의 터키 중남부 지역)에서 자기 가족과 재산을 챙겨 야반도주한 후 고향 땅인 남부 이스라엘까지 아마도 수주일간 땡볕에 걸어서(그나마 절반 가량은 절룩거리며) 갔지만 나는 보따리들을 이삿짐센터 트럭에 맡긴 후 아내와 함께 승용차를 몰고 시원한 에어컨을 쐬며 절경으로 이름난 워싱턴-오리건-캘리포니아 해안도로를 따라 사흘만에 내려왔다.

하지만 이번 이사가 결코 거저먹기는 아니었다. 미국을 거의 종단하는 이사거리가 야곱보다 수십 배 길었기 때문이 아니다. 짐을 꾸리기가 힘들었던 것도 아니다. 이사 해본 사람들은 알지만 신경 쓰이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섭섭한 마음이 시원한 마음보다 더 크다. 무엇보다 노년에 정들었던 사람들과 워싱턴주의 아름다운 산하를 뒤에 두고 떠나는 게 가슴 아팠다.

미국인들은 매년 4,000여만명이 이사한다. 해마다 인구 100명 중 15명이 주소를 옮긴다는 의미다. 취업, 결혼(이혼). 마이홈 구입, 가족 재결합 등이 주요인이고 나처럼 은퇴해 거처를 옮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내가 살았던 워싱턴주는 아마존 본사 덕분인지 2010~2017년 약 25만명이 이사해왔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같은 기간 556,000여명이 타주로 빠져나갔다.

한국 사람들도 자주 이사하는 편이다. 한 집에 사는 기간이 평균 7.7년이다. 자가 소유자들은 평균 10.6년마다, 전세나 월세로 사는 사람들은 3.6년마다 한번씩 이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6월 한달에만 484,000여명이 집을 옮겼다. 국민 100명 당 10명꼴이 넘는다. 지난 2014년엔 총 7629,000여명이 거주지를 옮겨 미국인들과 똑같은 이사율(15%)을 기록했다.

나도 10년에 한번꼴로 이사했다. 한국에서 4, 미국에서 3번이다. 하와이에서도 80년대에 1년반가량 살았지만 가족이사 수준은 아니었다. 이삿짐이 적었던 첫 두 차례는 동료들의 도움으로 쉽게 끝냈지만 이번엔 짐이 많은데다가 원거리여서 걱정이었다. 남들처럼 U홀 밴에 이삿짐을 때려 실은 후 승용차를 꽁무니에 매달고 내려갈 궁리를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 캘리포니아로 이사간 후 되돌아온 한 친지의 귀띔을 듣고 전문 이삿짐센터와 계약했다.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소위포장이사회사이다. 숙련 인부들이 각종 크기의 박스와뽁뽁이를 들고 달려와 모든 짐을 일사천리로 꼼꼼하게 포장했다. 박스에 붙일 내 이름표와 일련번호까지 준비했다. 요즘은 미국인들도 거의 모두 포장이사 회사를 선호한단다.

이삿짐은 적을수록 좋다. 폴란드의 고명한 랍비 집을 방문한 미국인 관광객들이 그의 방 안에 낡은 침대와 작은 책상만 있을 뿐 앉을 자리가 없자 소파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랍비는 방문객들에게당신들 소파는 어디 있오?”라고 되물었다. “지나가는 여행자들에게 가구라니요?”라는 방문객들의 핀잔에 랍비는나 역시 잠시 살다 가는 여행자요라고 대꾸했다.

내 이삿짐에도 가구는 싸구려 침대 하나가 전부였다. 129개 박스 중 절반 이상이 레코드판으로 채워졌다. 시애틀에서 수집한 4,000여장의LP와 그걸로 내가 틈틈이 녹음한 CD 3,000여매이다. 내 나이에 그 모든 것을 끌고 또 이사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어차피 마지막 한 차례 이사는 피할 수 없다. 그 이사는 누구나 빈 손으로 떠나게 돼 있으므로 매우 편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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