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산조망대/ 최초 한인여기자 카니강
시애틀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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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춘 한국일보 시애틀지사 전 고문
최초
한인여기자 카니강
‘베이케이션(V-A-C-A-T-I-O-N),’ ‘사내들이 있는 곳엔(Where The Boys Are)’ 등 감칠맛나는 카니 프란시스의 팝송이 한국에서 히트했던 70년대초, 카니 강이라는 재미동포 처녀기자가 한국일보 본사 영자자매지 코리아타임스에서 한동안 함께 일했었다. 엊그제 LA타임스가 보도한 강씨의 부음에 충격 받고 그녀의 반세기 전 희미한 기억들을 토막토막 떠올렸다.
‘베이케이션(V-A-C-A-T-I-O-N),’ ‘사내들이 있는 곳엔(Where The Boys Are)’ 등 감칠맛나는 카니 프란시스의 팝송이 한국에서 히트했던 70년대초, 카니 강이라는 재미동포 처녀기자가 한국일보 본사 영자자매지 코리아타임스에서 한동안 함께 일했었다. 엊그제 LA타임스가 보도한 강씨의 부음에 충격 받고 그녀의 반세기 전 희미한 기억들을 토막토막 떠올렸다.
한국
외국어대학에서 조교로 강의하며 신문사엔 비정규적으로 나와 잠시 일한 카니 강씨는 당시 코리아타임스의 최고참 여기자이며 사회부 차장이었던 임갑손씨(현재 LA 거주)와 곧바로
가까워졌고, 두 사람 사이의 교분은 강씨가 지난 주 췌장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LA 타임스 기사도 “(강씨는) 마음
속에 심미안을 지닌 기자였다”는 임씨의 말을 인용했다.
강씨는
홍 편집국장의 권유로 ‘서울 회전목마(Seoul Carrousel)’라는
타이틀의 고정 칼럼을 쓰기 시작했다. 글 중에 공중목욕탕 체험담도 있었다. 미국에는 없는 적나라한 인간사회 풍속도가 재미있어 출근길에 비누며 수건 등등을 커다란 백에 챙겨 목욕탕에 자주
들른다는 내용이다. 좀 썰렁했지만 미국 신문의 칼럼들이 모두 그런 스타일이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함경남도
함흥 인근의 단천이 고향인 강씨는 어려서부터 영어에 관심이 많았다. 훗날 서울대에서 영어와 독일어를
가르친 아버지의 영향 덕분이다. 그녀는 3살 때 아버지가
영어로 읽는 요한복음 14장 6절을 그의 무릎에 앉아서 따라
읊조렸다. 첫 영어공부였다. 단천에서 조상 대대로 수백년간
살아온 강씨 집안은 20세기초 한국 최초의 기독교 신자들 중 하나였다.
공산주의를
피해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월남한 아버지 강씨는 2차 대전 종전 후 맥아더장군의 오키나와 사령부에서
일했고, 카니도 그곳에서 영어로 수업하는 국제학교를 다니며 소녀시절을 보냈다. 그후 풀브라이트 교환교수가 된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옮겨온 강씨는 미주리대와 노스웨스턴대(석사)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고 주류언론 최초의 한인여기자가 됐다.
뉴욕주
로체스터의 지역신문에서 취재기자로 출발한 강씨는 40여년간 샌프란시스코의 이그재미너와 크로니클 등 유력
신문들과 UPI 통신 및 코리아타임스 등 외국의 신문, 잡지에서
기자, 편집자, 해외특파원,
논설위원, 칼럼니스트 등으로 일하면서 각종 상을 30여
차례나 수상했다. 1997년엔 아시안-아메리칸 언론인협회(AAJA)로부터 평생 업적상을 받기도 했다.
강씨가 LA타임스에 스카웃된 건 1992년이다. LA타임스는 그해 4ㆍ29 인종폭동의
최대 피해자였던 한인사회 취재를 맡길 능력 있는 한인기자가 필요했었다. 그 무렵 서울본사에서 파견 나온
나는 LA 영문판을 창간한 임갑손씨를 돕고 있었다. 강씨는
임씨 및 뒤에 영문판 책임자가 된 K.W. Lee(이경원)씨와
손잡고 미주 한미 언론인협회(KAJA)의 창설을 주도했다.
코리아타임스
시절 강씨의 또다른 에피소드가 떠오른다. 노총각들의 관심을 모았던 그녀는 뜻밖에 카피리더(교열담당)인 백인총각과 눈이 맞았다.
그 청년은 3선개헌을 앞둔 서슬퍼런 시절에 “박정희
대신 육영수가 출마하는 게 더 낫다”는 내용의 칼럼을 썼다가 정보부에 찍혀 한동안 피신했었다. 두 사람은 볼티모어로 사랑의 도피를 했지만 오래지 않아 결별했다.
강씨는
자서전격인 ‘내 고향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 한인가족 이야기’에서 “내 생각은 한인보다 더 미국인 쪽이고, 영혼은 미국인보다 더 한국인 쪽이지만 감정은 반반이다”라고 했다. 그게 이혼사유였는지 모른다. 그녀는 2008년 은퇴 후 풀러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자격시험에도 합격했지만 고향에 교회를 세우려던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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