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미 좋은 시-김백현] 내 그림자
시애틀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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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현
시인(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싸우고 나가려는 할망구에게
지난 번에 사준 화장품 내놓고 가라고 한다
할망구도 지지 않고 내 양말과 바지를 벗긴다
우리는 갈 데까지 간다
세찬 기세에 정원의 나무들이 흔들리는 날이다
할망구는 가방을 싸들고 씨씨하면서 현관문을 나서고
나는 엠엠하면서 문을 닫아건다
사흘 지나면 잊어버릴 이유 가지고 싸우지만
이때는 정말로 같이 죽자고 할 만큼 울컥하는 심정이다
세차게 불던 바람도 잔자누룩해지고…
도둑 고양이처럼 부엌 안을 살펴본다
온통 내게 등돌린 살림 뿐이다
‘어라, 진짜 할망구 편이네, 냄비야 나와라 라면은 어데 숨었냐?’
울화통에 뒤따라 서러움까지 나뒹군다
‘에라, 굶어 죽고 말자, 나 없으면 할망구도 후회될 걸’
햇살이 물결치는 호숫가를 앳된 할매와 파릇한 할배가 기대듯이 걷는다
이윽고 달은 떠오르고…
어느새 바람 그친 나무들이 한껏 다소곳하다
몇십 년 버릇인가, 잠자리에 손을 넣어본다
할망구의 체온이 아직도 따스하다
어디에 가 있던지 해질녘이면 돌아와, 꼭 옆에 눕던 그림자였는데
신행길에서부터 함께 눈비 맞던 할망구가, 홀연히 곁을 떠나고 있다
떡메로 얻어맞은 정신이 순간 벌떡 일어난다
갈 만한 데, 있을 만한 데, 다 수소문해봐도
내 색씨는 오지도 않았고 보지도 못했단다
불길한 생각이 온갖 꼬릴 치는 찰나, 셀폰이 자지러지게 운다
“네 엽세요. 아 목사님! 최집사댁에요? 고맙”
그때다, 문 밖 정원에 낯익은 등 모습 하나
땅으로 꺼진 듯이 앉아 풀을 뽑고 있다, 내 그림자다
앞뒤 없는 생각이 달려가 끌어 안는다
“오! 여보 고맙수”
‘라면도 못 끓이는 자존심은 시애틀을 떠나거라’
저물어가는
나잇살이, 나뭇잎에 함초롬히 얹히던
어느 나긋한 황혼녘이었다
어느 나긋한 황혼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