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에스더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그
날을 기다리며
에취! 매장에 막 들어서는데, 느닷없는 재채기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낏 돌아본다. 얼른 입을 가리긴 했지만, 아, 이 민망함이라니. 빨리
자리를 피하는 수밖에. 물건을 사는 둥 마는 둥 도망치듯 매장을 빠져나왔다. 차에 들어와 앉자 정신이 좀 드는데, 갑자기 콧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몸살감기에서
겨우 벗어났는데 또 재채기와 콧물이라니, 혹시? 남편은 괜한
걱정이라 하면서도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다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알러지 약을 건네준다. 거짓말처럼 콧물과 재채기가 멎고 그동안 칼칼하던 목도 곧 편안해졌다. 감기와
알러지도 감당키 어려운 이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한바탕 롤러코스터를 타고 난 기분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동네에서는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을 손에 꼽을 정도였다. 재채기 사건 후, 마스크를 쓰려고 찾아보니 집에 있는 것이라곤 페인트 칠할 때 쓰다 남은 것 몇 개뿐이다. 손을 잘 씻는 게 가장 좋은 예방법이라기에 그 말만 믿었는데. 이제
와서 마스크를 구하려니 하늘의 별 따기다. 차라리 내 손으로 만들어 쓰는 게 훨씬 쉬울 것 같다.
오랜만에
재봉틀을 꺼냈다. 자투리 천과 바느질 도구를 펼쳐 놓았다. 가위가
제 때를 만난 듯 삭둑삭둑 잘도 잘라낸다. 드르륵 드르륵. 재봉틀의
경쾌한 리듬을 타고 마름질한 조각들이 제법 모양새를 갖추어 간다.
겉감과 안감을 연결하고 끈을 달았다. 드디어 첫 작품 완성. 성능은 좀 떨어지겠지만 모양은 제법이다. 가족들과 직원들 수대로 만들다 보니 열 개를 훌쩍 넘어간다. 어떡하지. 마스크의 끈이 부족하다. 마침 구석에 털실이 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 했지. 코바늘로 사슬뜨기를 해서 끈을 대신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얼굴을 떠올리며 한 땀 한 땀 마음을 기울인다. 마스크를 만들며 ‘우리’를 생각한다. 두려움의
깊은 골짜기를 함께 지나가야 하는 ‘우리’. 각자 이름이
적힌 비닐 봉투에 마스크를 넣어 전해주었다. 삶의 최전선에서 바이러스의 공격에 맞서 하루를 살아내는
이들에게 힘과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마스크를
쓰면 말하는 게 여간 불편하지 않다. 자연히 말이 줄어들었다. 손님들과도
스니즈 가드를 사이에 두고 눈인사를 나누며 꼭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는다. 한 마디 인사에 담긴
마음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새삼 말의 온도를 생각한다.
마스크를
쓰고 나서야 알았다. 불필요한 말을 너무 많이 하며 살았다는 것을. 그동안
마구 쏟아 놓은 말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먼지와 소음을 일으켰을까. 내가 한 말들을 필터로 걸러본다면
과연 남아 있을 말이 얼마나 될까. 함부로 주절거렸던 누추한 말들이 행여 나쁜 바이러스가 되어 누구에게
아픔이 되지는 않았을까.
인간의
죽음이 한낮 통계의 수치로 기록되는 참담한 현실 앞에서 입을 다물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지 못하고, 함께 애도하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
고통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어야 하거늘. 귀를 더 깊이 열어 저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어야 하리라. 고귀한 생명들이 무심한 숫자에 묻히는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먼저 손을 씻고 마스크를 빤다. 손으로 조물조물 마스크를 빨며, 내 안을 들여다본다. 행여 붙어 있을지 모를 바이러스를 씻어내기
위해서는 이렇게 열심을 내면서도 매일 내 속에 쌓인 것들은 마냥 방치한 채 살아온 건 아닌지.
코비드-19가 내게 던지는 많은 질문 중 하나이다. 언제쯤 이 마스크를 벗을
수 있을까. 침묵으로 걸러낸 소리들이 감사와 위로가 되어 다른 이의 가슴에 향기로 다가갈 때쯤일까.
마스크를
쓰고 바삐 살아낸 하루가 또 저물었다. 아직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한가운데, 얼마나 더 지나야 할까. 그러나 반드시 끝이 있음을 안다. 어느 때보다도 더욱 마음을 잘 지켜야 하는 까닭이다. 이 험난한
계곡이 끝나는 곳에서 우리는 다시 새로운 삶의 기초를 세워 나가야 하겠기에.
그
날이 속히 오길 바라며,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