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준 장로(칼럼니스트)
‘사랑의 집’ 회상
1979년, 내가
이민 길에 오르기 직전 마지막으로 찾아간 ‘사랑의 집’은
김포공항 북편 어느 야산 기슭에 지은 흙 벽돌 집이었습니다. 그 곳은 당시 30대 초인 J 목사님 부부가 정신박약인 동시에 신체 장애자 16명의 고아를 사랑으로 양육하는 곳이었습니다.
신학을 하기 전에 영문학을 전공한 J목사님은 모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국문학을 전공한 사모님은 원고 교정 같은 일을 하면서 그 대식구의 살림을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들 두 분은 평생 그 고아들에게 온 정성을 쏟기 위해 모두 불임수술을 받아 그들의 몸에서는 혈육이 태어날 길을 차단시켰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은 모두가 거의 백치에 가까워 입으로 소리는 내지만 말을 하는 아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눈이 절반쯤 감겼는가 하면 귀가 없는 아이, 코의 형체가 없는가
하면 입을 다물지 못해 언제나 침을 흘리는 아이, 손이 오그라졌는가 하면 다리를 못 쓰는 아이, 그리고 6살쯤 되어 보이는 한 여아의 실제 나이는 19살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모로 보든지 그들 중에는 소위 ‘사람 구실’(?)을 할 것 같은 아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을 양육하는 데에는 어떤 인간적인 기대나 이해타산 같은 것이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는, 그야말로 순수한 인간애와 생명에 대한 외경심 외에는 아무 것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분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그 아이들의 대소변 관리 문제라고 했습니다. 음식 관리와 조절을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배설하는 어려움 때문에 잠을 설쳐야 하고, 세탁기도 없던 그 시절에 손이 발이 되도록 빨래를 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모님은 열여섯 자녀들의 식성과 체질과 음식물의 반응까지도 낱낱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우유를 먹여서는 안되는 아이, 찬 음료를 피해야 하는 아이, 일정한 양보다 조금이라도 과식을 하면 며칠 동안 고통을 겪어야 하는 아이, 알레르기성
때문에 어떤 음식물은 먹일 수 없는 특수체질 등….
사모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나는 신앙의 힘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발원되는 지고한 사랑의 힘이 아니고서는 그 엄청난 고역의 헌신을 도저히 감당해 나아갈 것 같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장성한 후에는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하고
나면 자녀를 얻게 되어 각자 자기의 자녀들을 양육하게 되어 있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도 떳떳할 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 미안할 일이
아니고 죄스러울 것도 없는 당연한 삶의 과정으로 우리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날 나는 J목사님 내외분 앞에서, 내 딴에는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나의 부부생활, 내 딴에는 자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세 남매의 자녀들, 내 딴에는 나에게서
태어난 자녀들을 책임지는 것만으로 내 할일 다하고 있노라고 자부하며 살아온 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고 송구스럽던지 그 분들 앞에서 머리를 바로
들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 후 서산에 기우는 해를 보면서 나는 그곳을 떠나야 했습니다. 학원에서
강의를 마치고 층계를 내려오다 발을 다쳤다는 목사님은 불편한 한쪽 다리를 지팡이에 의지하면서 나를 배웅하러 나왔습니다.
그때 사모님은 저 쪽에 설치된 화장실 옆에 서있었습니다. 손이 오그라져
쓸 수 없는 불구 아들의 용변 뒤처리를 해주기 위해 거기 그렇게 대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며칠 후에는 이민을 떠나야 하는 나로서는 그 분들과의 작별이 여간 서운한 게 아니었습니다. 고마운 두 분에게 석별의 인사를 남기고 나는 사랑의 집 모퉁이를 돌아섰습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나는 방금 떠나온 사랑의 집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노을이 곱게 물든 저녁 하늘엔 사랑의 집 굴뚝에서 피어 오르는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아마 사모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맛있는 저녁밥을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저토록 아름답고 값진 인생을 사는 분들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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