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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1-02 09:56
[신년 수필-배수영] 시상식과 전국 노래자랑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4,184  

배수영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 지부 회원)
 

시상식과 전국 노래자랑  
 
 
연말이 되면 각종 모임과 파티에 마음을 빼앗겨 무아지경이 된다
미국에서는 할로윈 때부터 각종 행사로 사람의 정신 줄을 쏙 빼놓기 때문에, 연말이 가을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인들은 각 명절에 맞춘 테마로 집 안팎을 장식하느라 한달 전부터 아이디어를 모색하고 재료를 사러 다니는 공을 들인다. 10월에는 도시 전체가 거미줄과 유령 천지다. 11월이 되면 귀신 장식이 싹 걷히고, 추수감사절 식탁에 놓일 칠면조가 마켓마다 꽉꽉 들어찬다.

이 시기부터 관공서 직원들도 느슨해져서 급한 용무가 있어도 담당자와 며칠씩 통화가 안 되기도 한다. 추수감사절의 열기가 식을 때쯤 되면, 이젠 또 크리스마스다. 고작 2~3주 보자고 무거운 생나무를 힘겹게 싣고 와 트리 장식을 한다

그래 놓고, 막상 나무를 버릴 때면 부피가 커서 일일이 도끼로 잘라 조각을 내느라 애를 먹는다. 나 역시 연말 분위기에 흥취가 돋아 크리스마스 장식을 충동구매 해버렸다. 백화점은 쇼핑을 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쇼핑이 아니라 전쟁이다. 파킹을 하려고 삼 십 분째 헤매는데 자리가 없다. 다시는 안 오겠다고 이를 갈면서도, 한편으론 아직 대세를 따를 수 있는 나 자신이 다행스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하긴,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사람 냄새에 한껏 둘러싸여 보겠는가.

또 하나, 연말의 재미는 각 방송사에서 여는 영화제와 시상식을 보는 것이다. 몇 년 전, 직장동료 제니가 우리 부부를 자신의 집에서 여는 파티에 초대한 적이 있다. 제니는 그 파티를 시상식 파티라고 불렀다

해마다 이맘때면 지인들을 한자리에 불러모아, 각자 들고 온 음식도 먹고 칵테일도 마시면서 텔레비전에서 하는 시상식 중계를 함께 보는 조촐한 파티였다. 그런 파티는 처음인지라 남편과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와인과 치즈를 사 들고 문을 두들겼다

과연 그녀의 집은 입구에서부터 각종 영화 포스터와 풍선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어떤 배우가 상을 탈지 알아맞히는 사람에게 준다며, 손수 예쁘게 포장한 경품까지 주르륵 놓여있었다.

텔레비전이 워낙 초대형 사이즈였기 때문일까. 새빨간 레드 카펫 위를 걸어 나오는 여배우들의 고혹적인 드레스에 눈이 휘둥그래졌다. 레이스 한 올까지 선명하게 보이는 고화질의 강렬함에 압도된 우리는 시상식을 보는 내내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환호하는 관객들에게 우아한 미소로 화답하며 손을 흔들 때마다, 그녀들의 새하얀 목덜미와 귓바퀴에서 찰랑대는 보석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레드 카펫 행렬이 끝나고, 영화제는 곧 축하무대와 수상으로 이어졌다. 영화에는 관심도 없고 배우 이름이라고는 단 한 개도 모르는 남편이 운 좋게 수상자를 맞춰서 경품을 타기도 했다.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내 눈에는 아직도 레드 카펫 위에서 손을 흔드는 여배우의 자태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나는 화려한 것을 보면 한동안 그것이 자아낸 환상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잠자리에 들 채비를 마치고 누웠는데도 여전히 드레스의 번쩍임에 취해 있던 중, 어디선가 나의 환상을 무참히 깨는 소음이 들려왔다. 딴 딴딴 딴딴~ 따라라 따라 라~ 딩 동 댕 동~ 대체 어디서 들리는 소리인가 싶어 두리번거리니, 범인은 다름 아닌 남편이었다


남편이 전국 노래자랑을 보며 재미있다고 손뼉까지 치고 있었다. 뭔가 적절치 않은 타이밍이었다. 나는 기가 막혀서 남편을 쳐다보았다. 남편은 아직 마흔 중반도 안 되었지만, 요즘 유행하는 노래보다 흘러간 옛 노래나 트롯트를 즐겨 듣는 사람이니 놀랄 일도 아니었다. 전국 노래자랑 역시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 중 하나다. 하지만 하필 지금이라니. 내가 아직도 시상식의 눈부신 영광과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있는 이 순간에 말이다.

그 때, 머리에 번득이며 지나간 깨달음 하나가 있었다. 세상에 난무하는 화려함이 도처에서 나를 유혹할 지라도, 내가 쉽사리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중심을 유지한다면. 눈부심이 나의 시야를 흐릴 지라도,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나만의 줏대를 지킬 신념이 있다면

몸빼를 두른 아낙의 고성방가와 송해 아저씨의 구성진 목소리가 비록 레드 카펫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온 세상이 레드 카펫만 쳐다볼 때 내 옆의 이 남자는 폭풍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만의 고요를 지킬 사람이라는 사실이 새삼 감개무량했다.

파티가 끝나면 집을 치워야 한다. 이제는 나도 지난 해의 야단법석을 빨래 개듯 차곡차곡 서랍에 넣어야겠다. 트리에 달았던 장식을 하나하나 떼내어 상자에 정리해 본다

12월이 화려한 유화라면, 1 월은 단아한 수묵화다. 하얀 화선지에는 자고로 여백을 남겨야 제 맛이다. 당신에게 지난 일년이 온통 생채기뿐인 해였는가. 혹은 부끄러워 태워버리고 싶은 일기장 같은 해였는가. 이별의 아픔도 있었겠고 재회의 기쁨도 있었을 것이다. 다 괜찮다. 지친 마음은 차가운1월 바람에 털어버리면 된다. 새해를 핑계로 우리는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다짐을 하고, 부끄러운 일을 망각할 수 있다.

순 우리말로 1월을 해오름달이라고 한다. 첫 태양의 기운에 한껏 부푼 기대를 걸고 또다시 나의 운명을 맡겨본다. 올 해도 잘 해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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