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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7-06-25 12:47
[시애틀 수필-이경자] 60년의 회한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2,076  

이경자 시인(워싱턴주 기독문인협회 회원)
 
60년의 회한

 
내가 자란 시골은 가난했지만 평화로웠다. 그 해(1950) 초여름도 벼들이 따사로운 햇볕에 일광욕하듯 진초록 빛을 발산하며 호수처럼 잔잔한 물결이랑을 이루고 있었다. 처마 밑에 집을 지은 제비가 먹이를 물어다가 새끼들의 입에 넣어주느라 분주했다.

파란 하늘에 하얀 뭉게구름이 돛단배처럼 떠다녔고, 뒤란 토담 아래에는 채송화, 봉선화, 접시꽃들이 만발했다. 감나무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린 풋감들이 이마를 맞대고 조곤조곤 속삭였다.

평화롭던 동네에 갑자기 엄청난 풍랑이 몰아쳤다. 

625 전쟁이 터졌고, 큰 오빠가 갑자기 징집됐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정화수를 떠놓고 오빠의 무사귀환을 빌었다. 인민군이 밀어닥쳐 낙동강 다리가 폭파됐다. 대구에서 고모가족이 우리 집으로 피난 왔고, 깊은 산골에 살던 외갓집도 공비를 피해 우리 집으로 왔다

마당에 까지 홈리스 피난민들이 천막을 치고 살았다. 조용하던 동네가 피난민들로 북적댔고, 동구 밖 텃밭의 채소는 먼저 따가는 사람이 임자였다.

큰 오빠의 안부를 전혀 모르고 있던 그 해 8월 마을 앞 개천변에 미군부대가 들어섰다. 개천에 멱 감으러 간 우리들에게 한 코쟁이 미군이 가까이 오라며 손짓했다. 모두들 겁이 나서 멈칫거렸다

그 중 나이배기(10)였던 내가 용기를 내어 다가가자 미군이 알사탕과 껌을 듬뿍 건네줬다. 그 뒤로 미군이 무섭지 않았다. 며칠 뒤 한밤중에 폭탄소리가 들리고 미군부대 쪽이 대낮처럼 환했다

이튿날 아침 부대 막사 일부가 공비들이 던진 수류탄으로 폭파돼 한밤중에 총격전이 일어났고, 민간인 몇 명이 빨갱이에게 총살당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에게 껌을 준 그 미군의 안부가 궁금했다.

미군부대가 남쪽으로 철수하면 우리도 따라 내려가야 한다며 어머니는 미숫가루와 콩가루 등 비상식량을 준비하셨다. 그 무렵 훈련 받던 학도병들도 남쪽으로 후퇴했다. 급식이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부잣집 아들처럼 준수한 모습의 청년들이 동네에 들어와 구걸했다.

큰 오빠 얼굴이 오버랩 됐다. 국도에 줄을 지어 남쪽으로 향하던 훈련병들 중 절뚝절뚝 발을 절던 청년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며칠 후 온 동네가 울음바다가 됐다. 큰 오빠와 함께 징집돼간 몇몇 마을 청년의 가족에게 전사통보가 전달됐다. 마치 큰 오빠가 당한 듯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그 후 가슴에 폭탄을 안고 두근거리며 사셨다.

이윽고 오빠 소식이 왔다. 역시 좋지 않았다. 중동부 전선에서 북한군에 밀려 후퇴하던 중 철원 인근 전투에서 오빠가 왼쪽 허벅지에 총탄을 맞았다

낙오된 오빠는 피를 뿜는 다리를 끌고 간신히 고개를 넘어가 후퇴하는 아군을 만났고, 그의 부축을 받으며 또 다른 고개를 넘은 후 운 좋게 지나가던 국군 수송트럭을 만났다. 트럭에 적재된 가솔린 드럼통이 적군의 총격으로 구멍이 숭숭 뚫렸고, 거기서 새어 나온 기름이 바닥에 뉘인 오빠의 몸을 온통 적셨다. 작은 불씨로도 트럭이 폭발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서울로 후송됐던 오빠는 곧 대구도립병원으로 옮겨졌다. 고모님이 자주 사식을 넣어주어 얼마 후 어머니가 면회 가셨을 때는 건강이 많이 회복됐다. 그 후 오빠는 다시 부산병원으로 옮겨졌다

당시 민간인들은 기차를 탈 수 없었다. 대중교통수단이 전혀 없던 때여서 화물트럭이라도 얻어 타면 운수 대통한 날이었다. 어머니는 그 먼 거리를 걸어서 면회 가기 일쑤였지만 그때마다 찰떡을 머리에 이고 가셔서 군침을 흘리며 바라보는 오빠의 동료 부상병들에게도 나누어주셨다고 했다

오빠는 결국 상이용사로 제대했지만 다행히 뼈를 다치지 않아 걷는데 불편이 없이 살다가 3년 전 82세를 향수하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사콰는 옛날 시골고향처럼 조용하고 평화로우면서 풍요롭기까지 하다. 매일 아침 친구와 함께 동네 숲길을 산책하는 게 나의 일과다. 어제는 혼자 작은 동네호수 주변을 걷다가 벤치에 앉아 물에 거꾸로 비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옛날 일들을 떠올렸다

모든 사람의 운명이 일시에 거꾸러졌었다. 오빠 만이 아니다. 거꾸러진 운명을 만난 참전용사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아직도 많은 호국영웅들이 이름 모를 산하에 묻혀있다고 했다. 적지 않은 625 미망인들이 60년 넘게 회한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을 잇달아 강행하고 있고 남한에선 이에 대비한 사드 미사일 배치를 놓고 국론이 분열되는 등 어수선한 분위기이다. 김정은은 남한은 물론 일본과 미국 땅까지 미사일로 직접 요격하겠다며 호언한다

해외 동포들도 모두 동족상잔의 회한이 또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 38선을 검문 없이 넘나드는 바닷물처럼 남북한 동포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날이 하루빨리 오도록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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