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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2-20 01:45
[시애틀 수필-이한칠] 하던 대로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4,177   추천 : 0  

이한칠 수필가(한국문인협회 워싱턴주지부 회원)

하던 대로     

가을을 맞는 둥 마는 둥 하는 사이, 겨울이 왔다. 

추수감사절은 가을의 백미다. 가족들이 모여 음식을 함께 나누며 감사하던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던가. 올해는 그런 귀한 순간을 맛보기는커녕, 가을이 온 줄도 몰랐다. 질긴 코로나 바이러스 속에서 활동 반경이 줄다 보니 가재걸음 친 것만 같다.

겨울을 재촉하는 듯, 어제 온종일 비바람이 불었다. 뒤뜰에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한 올도 걸치지 않은 나목이 휑하다. 기둥 외피가 군데군데 갈라져 거칠다. 겨울 준비에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번잡스러운 세상에 우왕좌왕하지 않고, 사시사철 제 역할 하는 자태가 너볏하다.  

옷을 벗은 나목이어서일까. 이층 지붕 위로 뻗친 나뭇가지들이 눈에 보인다. 가느다란 줄기들이 하늘을 찌를 듯 키재기한다. 담장 너머 길게 뻗은 곁가지들은 옆집이 제집인 양 주인인 나를 모르는 척한다. 굵다란 나무 기둥 사이에 속 가지들이 빼곡히 들어찼다. 내가 곁눈 판 사이에 곳곳마다 멋대로 자란 가장이들이 민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나무들 모양새도 ‘건시나 감이나’였다. 가지치기해야 할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은근슬쩍 고개를 돌렸다.    

지난 2, 미주 첫 코로나 바이러스 사망자가 이곳 워싱턴주에서 발생했을 때, 너 나 할 것 없이 긴장했다. 설마했는데, 초겨울인 지금도 힘겨운 상황은 잦아들 기미가 없다. 일상이 바뀌었다. 식료품도 현관 앞으로 배달시킨다. 회의는 화상으로 한다지만, 나처럼 사람을 좋아하는 이들은 아쉬워할 것 같다. 얼굴 마주할 일이 갈수록 멀어진다.

처음으로 아내와 단둘이 추수감사절을 보냈다. 코로나 시대에 걸맞게, 아이들과 화상으로 만찬을 즐겼다. ‘건배!’ 노트북 앞에서 와인잔을 들었다. 땡스기빙 데이 이래 첫 진풍경이었지 싶다. 알고 보니, 이번에 나처럼 고요히 지낸 친구들이 부지기수였다.

추수감사절 연휴 뒤에는 으레 크리스마스 트리를 준비했다. 웬일일까. 땡스기빙 데이처럼 성탄절도 예년처럼 다같이 모이지 못해서일까. 12월도 한참 지났는데, 아내가 조용했다. 차고에 쌓여 있는 트리 장식 상자에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트리 없이 조용히 지내보자는 속셈인 듯했다. 할 일 하나 줄어든 것 같아, 나도 시치미를 떼고 모르는 체했다.

토요일마다 멀리 있는 가족과 화상 회의를 한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했는지 누군가가 물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아무도 집에 오지 못하니, 올핸 그냥 넘어가려고, 하하하.’ 나는 어벌쩡하게 답했다. ‘하던 대로 하시지요.’ 이구동성이 돌아왔다. 하던 대로? 짤막한 그 말이 신선했다. 잔뜩 느슨해진 내게,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는 말로 와닿아 뜨끔했다.

뒤뜰 나목과 눈이 마주쳤다. 어떤 나무가 계절을 뛰어넘자 할까. 겨울이 두려워 옷을 벗지 않겠다고 우겨댈까. 수목은 꽃과 잎을 피워 열매를 맺고, 단풍이 들고 낙엽이 되어 스스로 거름이 된다. 급기야 맨몸으로 추위를 이겨 낸다. 코로나 바이러스 탓으로 가끔 좌고우면하는 나를 발견한다.

앙상한 가지들을 안고 묵묵히 서 있는 나목이 내게 눈짓했다. 그는 나에게 할 일을 건너뛰지 말라고 뚱겨주는 것 같았다. 

그래, 지금이 미루었던 가지치기 적기다. 마음을 도스른 뒤, 눈으로 적당한 나무의 키를 둥그러니 그렸다. 사다리를 놓고, 매실나무부터 전정했다. 혼자만 불쑥 웃자란 도장지를 베어냈다. 숨통을 터 주려고 속 가닥들을 정리했다. 사득다리는 손으로 따 주었다. 땅을 향한 가지들도 무조건 잘랐다. 내 맘에 자리 잡은 쓸데없는 것들을 내치듯 척척 쳐 냈다. 혹시 과하게 가지 친 건 아닐까. 봄에 얼마만큼 꽃망울을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우북수북 쌓인 낙엽을 갈퀴로 긁어 모아 두엄더미에 얹었다. 벌써 비옥한 흙내가 나는 듯했다. 잔디 위를 덮은 잎도 잔 갈퀴로 훑어 냈다. 빗으로 머리를 손질해준 것처럼 잔디가 말쑥해졌다. 시원스레 머리를 깎은 나목들이 단아하게 웃었다. 그제야 나도 그들과 함께 겨울을 맞이했다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했다. 아기자기 매달린 장식품들이 생글거린다. 뭉그적대며 슬며시 넘어가려 했던 마음을 들킨 것 같아 겸연쩍다. 집에 머문 핑계로 머리 깎기를 몇 달 째 미루었었다. 드디어 더부룩하게 길렀던 내 머리도 나목처럼 추켜 깎았다.

지나치려던 사소한 일을 했더니, 나름대로 뚝심이 생긴다. 주어진 조건이 어수선할수록 하던 일을 거르지 않고 하다 보면, 곧 회복되리라 믿는다. 코로나바이러스 백신이 달려오고 있다. 희소식이다. 늘픔을 기대해 본다. 하던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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