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두 목사 (유진 중앙 교회 담임)
좁은 길의 능력
단촐한 가족같이 작은 수가 모이는 개척교회라 성도들은 서로의 사정과 형편을 잘 알고
지냈습니다.
부평 공단이 들어서자 가난에서 벗어나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모여든 서민들이어서 거의가 월세나
전세방을 얻어 살았습니다. 청년들도 대부분 자취하면서 공단의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교우들은 교회 건물이 빚으로 넘어가고 있었지만 유지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습니다.
초대 목회자였던 목사님의 사임 이후 교인들은 흩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까지
교회를 지키려고 발버둥친 몇 안 되는 가족들 중 저의 삼촌이자 어린 시절 고향에서 저를 교회로 인도하신 전영연 집사님의 가족이 있었습니다.
전 집사님은 조카가 개척교회에서 힘들게 사역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늘 안스러워 했습니다. 삼촌 가족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습니다.
고향을 떠나 여러 남매를
데리고 부평에 정착한지도 그리 오래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땅한 직업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주경
야독의 고된 생활에도 부모님의 신앙을 소중하게 여기며 교회 봉사에도 열심이었습니다.
삼촌네 가족이 믿음
생활을 시작했던 고향교회는 1953년 한국동란이 끝나던 해에 개척됐습니다.
상주군에 소재한 조그만 농촌이었는데 전체 인구가 40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 작은 마을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삼촌 가족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흙 벽돌로 벽을 쌓은 후 초가지붕을 덮어 아담한 교회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예배당이
완공된 후 이웃 마을의 성도들을 초청하여 입당 예배를 감격적으로 드렸습니다. 삼촌 식구들은 동민 전도에
열정적이었습니다.
당시 전국을 무대로 전도 집회를 인도했던 한부선(Bruce
Hunt) 선교사님을 초청해 전도 집회도 개최했습니다. 그때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저도
미국인 선교사님이 전도 집회를 인도한다는 소식을 듣고 교회로 달려갔습니다.
대부분 동민들은 생전 처음
보는 서양인이라 선교사님을 볼 수 있는 것만해도 화제거리였습니다.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한국말을
스스럼 없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억양은 서툴렀지만 단어 사용은 정확했습니다. 그 당시 예배당 바닥은 마루로 되어 있었고 신발을 벗어서 신장에 넣게 되어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의 구두신발이 얼마나 컸던지 어린 저의 눈에는 마치 강을 건널 때 사용하던 배와 같다고 느껴졌습니다. 부끄러워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한 우리에게 선교사님이 다가와 "안녕하십니까?"라고 반갑게 인사하던 모습은 몇 십년이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삼촌네 가족은 칠 남매의 자녀를 두고 있었습니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었지만 삼촌 내외분과 자녀들은 주일 성수에 열정적이었습니다.
바쁜 농사철에도 주일 예배를 빠진
적이 없었을 뿐 아니라 완전한 주일성수를 하셨습니다. 주일 오전 예배는 11시에 시작했는데 예배가 시작되기 전인 10시에는 삼촌이 주일마다
장년 공과공부를 인도했습니다.
교사 출신답게 삼촌은 차근차근히 성경의 의미를 풀이해주고 믿음 생활의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어느 한 해는 가뭄이 심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내기를 하지 못하고 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토요일 밤부터 단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동민들은
논으로 달려가 물이 논에 고이도록 둑을 막고 무사히 모내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
삼촌네는 주일 예배
참석으로 그 빗물을 받아 모내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 해 농사는 망치고 말았습니다. 동민들은 삼촌네 가정을 예수에 미친 가정이라고 오랫동안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러나
삼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가난했지만 신앙의 절개를 굳게 지키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후에 삼촌 식구들은 부평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리고 조카인 저는 전도사로, 삼촌 내외분은 같은 교회의 집사님으로 부평 개척교회를 섬기게 되었습니다. 꿈만
같은 일이었습니다.
비록 가난한 개척교회였지만 믿음의 부유함으로 우리는 그 가난을 탓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삼촌의 첫 아들이자 저와는 4촌 형제간인 전병성 목사님은 부산 감천
제일교회에서 은퇴하기까지 평생을 주님 나라 위해서 그 아버지의 걸어간 믿음의 길을 충직하게 걸었습니다.
그
바로 밑의 딸인 전화선 사모는 김만두 목사의 아내가 되어 김해에서 은퇴하기까지 일생을 헌신했고 막내 아들인 전성수 목사님은 큰 형의 길을 따라
묵묵하게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부평교회에서 주경야독으로 열심히 살았던 전성오 선교사는 X-ray 기사로 병원에서 은퇴 후 의료 선교사로 지금은 동남아시아에서 섬기고 있습니다.
두 딸들도 장로님들의 아내가 되어 귀한 사역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좁은 길을 걸어가셨던 삼촌의 가정에 베풀어주신 주님의 선하신 은총은 지난 날의 아픈 상처들을 말끔히 씻어내는 위대한 능력으로 다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