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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0-03 06:35
눈산조망대/ ‘도람뿌’여 안녕
 글쓴이 : 시애틀N
조회 : 7,018  

윤여춘 한국일보 시애틀지사 고문


‘도람뿌’여 안녕
 

언젠가 회식자리에서 한 올드타이머 친지가 ‘도라무 깡’ 술집이 그립다고 말했다빈 석유 드럼통에 불을 피우고 삼겹살 따위를 구워 먹었던 한국의 옛날 서민식당 얘기다

미국인과의 대화에 불편이 없고 식당도 꼬박꼬박 레스토랑이라고 말하는 그가 ‘드럼’을 도라무 깡이라고 말한 것이 이채로웠다. 언어습관은 참으로 고치기 어렵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도라무 깡은 ‘드럼 캔(drum can)’의 일본식 발음이다. 일본 글자로는 드럼 캔을 표기할 수 없다. 트럭도 ‘도라꾸’라고 말한다. 내가 자란 시골마을에 어쩌다 부자손님이 읍내에서 택시를 타고 들어오면 마을 사람들이 ‘다꾸시’가 왔다며 구경했다

‘미싱’(재봉틀)은 ‘스윙 머신(sewing machine)’에서 sewing을 떼고 멋대로 고친 일본식 영어인데 아직도 건재하다.

나는 고스톱을 잘 못 치지만 ‘도람뿌’는 더 서툴다. 카지노의 트럼프(trump) 게임을 ‘도람뿌’로 발음하는 사장님들이 많았었다. 일제치하 때부터 그래 왔다. 요즘 좌충우돌하며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을 주도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첫 이미지가 나에겐 시큰둥했다. 이름이 카지노를 연상시켰고, ‘도람뿌’라는 우스꽝스런 일본식 발음처럼 어딘지 구태가 있어 보였다.

우리 말 속에 살아 있는 일제 잔재는 엄청 많다. 음식 중에만도 가께우동(가락국수), 야끼만두(군만두), 짬뽕(혼합 초마면), 다대기(다진 양념), 사라다(샐러드), 모찌(찹쌀떡), 오뎅(생선묵), 아나고(붕장어), 와사비(고추냉이), 돈까스(돈육 커틀릿), 함박스텍(햄버그 스테이크) 등이 있다. 시보리(물수건), 히야시(차게 함), 조끼(영어의jug, 큰 맥주 잔)도 일본말이다.

한국에서 매년 한글날(109) 무렵에 일본말 추방 캠페인이 반짝하지만 거의 실현 불가능해 보인다. 한자 일본어가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구좌, 잔고, 노임, 수당, 인상, 지분, 가처분, 각서, 견습, 견적, 매점, 매상, 부지, 매립, 육교, 입구, 입장, 수취인, 절취선, 세대, 생애, 촌지, 추월, 출산, 축제, 할증료, 회람, 낭만, 기라성, 시말서 등이 모두 일본말이다.

옛날 일제통치하에서 심어진 일본 한자어나 일본식 영어만 문제가 아니다. 요즘도 정체불명의 새로운 말들이 매일 쏟아진다. 한국이 모든 영역(정치는 빼고)에서 눈부시게 발전하는 덕분이다. 영어를 이해 못해 고생했던 올드타이머 한인들이 지금 한국에 가면 이제 한국말을 이해 못해 고생한다. 하긴 본국 노인들도 젊은이들 말을 이해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국립 국어원이 2014년의 신어로 인정한 ‘금사빠녀’(금방 사랑에 빠지는 여자), ‘꼬돌남’(꼬시고 싶은 돌아온(이혼한) 독신 남자), ‘핵꿀잼’(매우 재미있음), ‘심쿵’(심장이 쿵할 정도로 놀람), ‘맛저’(맛있는 저녁), ‘돼지맘’(학부모들을 학원으로 몰고 다니는 어머니), ‘오포세대’(연애, 결혼출산․인간관계․주택구입을 포기한 세대) 따위를 알아듣는 한인이 몇이나 될까?

주로 밀레니얼 세대(1981~1997년 출생)가 텍스팅(문자 메시지)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내는 이런 신어들은 인터넷 세태의 부산물이다. 꼭 부정적이지도 않다. 영어도 마찬가지 추세다.

ASAP(as soon as possible, 최대한 빨리), BRB(be right back, 곧 돌아오겠다), IDK(I don't know), OMG(Oh, my God!), 'HAND'(have a nice day) 따위가 널리 쓰인다.

진짜 문제는 문자언어가 음성언어에 우선하는 의사소통 수단이 되면서 홀대 당하는 철자법이다. 빨리 텍스팅하기 위해 ‘갓다’ ‘햇다’ ‘먹엇다’ 등 겹받침을 무시한다. 귀띔을 ‘귀뜸,’ 몹쓸을 ‘못쓸,’ 됐다를 ‘됬다,’ 금세를 ‘금새,’ 쩨쩨하다를 ‘째째하다,’ 뒤치다꺼리를 ‘뒤치닥거리,’ 머리숱을 ‘머리숫,’ 곱빼기를 ‘곱배기,’ 늘그막을 ‘늙으막’으로 잘못 쓰기 일쑤다.

한글은 모든 소리를 표기할 수 있어서 우수하다. 일본사람들과 달리 Trump를 ‘도람뿌’ 아닌 트럼프로 정확하게 표기한다. 하지만, 의사소통엔 정확한 음성언어와 문자언어만 중요한 게 아니다. 화법도 중요하다. “미국의 한국방어는 미친 짓,” “모든 불법이민자 추방,” “여자는 피 흘리는 동물”등 막말을 쏟아내는 트럼프 후보의 ‘도람뿌’ 식 화법은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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